맑고 향기롭게 후원하기

언론

    • 22-11-18

    뉴시스] ‘쏘로우의 월든 호수에서 법정 스님을 만나다’ 상민 스님 동행기

본문

【콩코드(美매사추세츠주)=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쏘로우를 흠모하는 이라면, 혹은 법정 스님에 매료된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고 싶은 곳이 있다. 매사추세츠 콩코드에 있는 월든 호수다. 



 미 동부엔 빼어난 절경의 호수들이 많지만 월든 호수만큼 특별한 곳을 찾기란 힘들다. 작가이자 시인이었고 노예 폐지론자, 자연주의자, 조세 저항가요, 문명 비판가이자 측량조사관, 역사가, 철학자, 탁월한 선험론자였던 19세기 가장 위대한 인물. 무엇보다 대사상가로서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와 인권운동의 기수 마틴 루터 킹 등 후대의 위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헨리 데이빗 쏘로우(Henry David Thoreau, 1817∼1862)를 얘기하면서 월든 호수를 떼놓을 수 없다.


 쏘로우는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기 위해서” 1845년 3월 월든 호숫가 숲으로 들어갔다. 작은 통나무집을 짓고 2년2개월2일 간 살면서 일상의 관찰과 사색을 일기로 남겼고, 훗날 ‘월든’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월든'은 물질문명에 사로잡힌 현대인에게 자연의 소중함을 알고 삶의 목적을 일깨워주는 비판적 성찰의 기록집이다.


 이 책은 쏘로우의 생전에 소수의 숭배자들만 있었지만 사후 비평가들에 의해 자연의 상징과 조화, 아름다움의 정수(精髓)를 사회문화적으로 분석한 명저(名著)로 자리매김했다. “월든 하나로 쏘로우는 우리가 미국에서 거둔 모든 것을 능가했다”고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말처럼.


 월든이 한국인들에게 더욱 유명해진 것은 20세기 한국 최고의 산문작가 법정 스님의 글에서 자주 언급된 덕분이다. 법정 스님은 생전에 쏘로우를 누구보다 흠모했다. 미 동부를 방문할 기회가 있을 때면 월든 호수를 찾아 쏘로우의 자취를 더듬었다.


 법정 스님을 위해 두 번 이곳을 안내한 뉴욕 불광선원 주지 휘광 스님(미동부해외교구장)의 회고다. “법정 스님이 처음 통나무집을 찾으셨을 때 ‘쏘로우 선생, 저 법정입니다. 법정이 왔습니다’ 이렇게 인사를 하시더군요.”



만추(晩秋)로 깊어가는 시월, 법정 스님 덕분에 출가의 길을 택한 상민 스님(뉴욕 원각사)과 동행하여 월든 호수로 차를 몰았다. 뉴욕에선 3시간40분의 여정이지만 보스턴에선 20여분 정도면 닿는다.


 지난해 12월 뉴욕 원각사와 인연을 맺은 이래 상민 스님이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은 바로 월든 호수였다. 법정 스님이 쏘로우의 자취를 더듬으며 환희심에 차올랐듯 상민 스님도 “무척이나 존경하던 법정 스님께서 와보신 곳을 직접 보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고 감격스러워 했다.


 ◆ 월든을 찾는 쏘로우의 후예들


 월든 호수 주차장을 벗어나면 자그마한 통나무집이 나온다. 가로 4.6m, 세로 3미터, 높이 2.4m 크기,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작은 침대가, 왼쪽엔 의자 두 개와 작은 탁자, 맞은편엔 벽난로가 있다. 복제된 쏘로우의 통나무집이다. 쏘로우가 저서 ‘월든’에서 손수 집을 지으며 상세하게 묘사한 내용대로 복원한 것이었다.


 이곳의 공인가이드 마틸다는 법정 스님 덕분에 월든 호수를 찾는 한국인들이 많다고 하자 “인도인들도 쏘로우의 영향을 받은 마하트마 간디로 인해 이곳에 많이 온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2차선 도로를 건너 비탈길을 20ㅡ 정도 내려가면 눈앞에 펼쳐지는 호수, 비취처럼 투명한 월든의 호반을 보는 누구나 ‘아!’ 하는 탄성이 나온다. 오목한 백사장이 앞에 있고 양 옆은 그늘 깊은 숲이 호수를 두르고 있다.


 영어로 월든 호수는 ‘Walden Pond’다. 엄밀히 말하면 ‘월든 연못’인 셈이다. 그러나 가장 깊은 수심이 20m에 가깝고 둘레가 4㎞나 되니 한국인의 눈에는 결코 연못 수준이 아니다.


 1만2000년 전 빙하가 녹아 지금의 호수가 만들어졌다는 설명처럼 호수의 물은 너무나 맑고 투명하다. 쏘로우는 이 물을 그대로 길어서 마셨다.


 상민 스님은“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아름답다. 중국 주자이거우(九寨溝)에서 보았던 물 빛깔처럼 비취색으로 햇살에 빛나고 시간이 정지된듯 하다”고 놀라워 했다.


 개인적으로 월든 호수를 찾은 것은 이번이 네 번째였다. 그런데 월든은 좀 달라져 있었다. 앙증맞은 크기의 백사장이 거의 두 배 이상 커졌고 모래사장을 따라 호수 전체를 산책할 수 있는 작은 둘레길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전까지는 숲의 오솔길을 통해서만 호반을 내려다 볼 수 있었는데 월든을 체험하는 두 개의 길이 생긴 셈이다.


 여름이면 인근 주민들의 작은 피서지였던 이곳이 본격적인 관광지로 개발이 된 것 같아 조금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이전엔 오솔길을 걷다가 중간중간 호수로 이어지는 계단 형태의 너럭바위에 걸터앉아 호반의 물결을 바라보며 책을 읽거나 상념에 잠길 수 있었는데….


 쏘로우는 2년여 간 월든에서 고독을 즐겼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지내는 것이 심신에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고독만큼 친해지기 쉬운 벗을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쏘로우의 ‘월든’에서)


 ‘생각하는 바위’에서 독서를 하거나 사색하는 쏘로우의 후예들, 월든에서 ‘월든’을 읽는 그들을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되버렸다. 바위로 통하는 길이 철망으로 막혀 있었고 설사 열렸다 해도 눈앞에 백사장 산책로가 있으니 쏘로우의 고적한 낭만은 영영 찾을 길이 없어진 것이다.


 ◆ 자취없는 통나무집


 월든이 살았던 통나무집은 호수 오른쪽 트레일을 따라 1㎞ 정도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비록 백사장 둘레길이 생경한 느낌을 주었지만 월든의 아름다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자연의 적막에 싸여 길을 건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면 월든의 맑은 물에 투영되는 단풍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쏘로우의 통나무집은 15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무너져 돌무더기로 뒤덮였다. 후대의 사람들은 마치 유적 발굴을 하듯 이곳의 집터를 경계석으로 표시하고 안내판을 세워 두었다. 쇠줄이 걸린 경계석 안팎으로 글씨가 새겨진 두 개의 돌이 박혀 있었다. 하나는 헛간(Woodshed), 또 하나는 굴뚝(Chimney) 자리다.


 아마도 쏘로우는 자신의 통나무집이 흔적 없이 사라질 것으로 예견했던 모양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지상의 건물이 사라지고 나면 후세 사람들은 땅에 파인 자국을 보게 될 것이다. 결국 집이란 것은 여전히 굴 입구에 만들어놓은 일종의 현관인 셈이다.”(쏘로우의 ‘월든’에서)


 쏘로우와 법정 스님의 체취가 함께 느껴져서일까. 상민 스님은 시종 감회어린 표정이었다.


 “출가 전부터 법정 스님을 책을 모조리 읽고서 저 또한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동경했습니다. 늘 불안하고 인생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젊은 시절에 유일하게 스님의 책과 자연이 위안이 되었습니다. 출가 후 백두대간을 한 달 간 구간종주를 했고 해남 땅끝 마을부터 통일전망대까지 우리국토를 대각선 방향으로 국토 종주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바라본 우리 산하와 대지는 얼마나 아름답고 가슴 벅찰 정도로 감동이었는지, 영화 ‘In to the wild’에 나오는 주인공이 알래스카에 도착해 들소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눈물짓던 것과 같은 감정을 받기도 했습니다.”


 법정 스님과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작 실천에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뇌출혈로 가족에게 한마디 말도 못 남긴 채 유명을 달리해 큰 충격을 받았고 많은 방황 속에 사람은 왜 사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게 했다.



 “쇼펜하우어나 니체, 보들레르와 같은 염세주의 철학과 시에 탐독하기도 했고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 불교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지만 법정 스님의 글을 읽노라면 무척 마음이 편해지고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당당하게 자연과 벗하며 홀로 사는 모습이 하나의 신선한 충격이었고 저 또한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감히 그렇게 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어머님이 걱정되었고 무엇보다도 저 자신에 대한 확신한 믿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대학에 들어갔고 군대도 다녀오면서 청소년기에 들었던 방황은 많이 사라졌지만 졸업 후 다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엄습했다. 29살이던 2002년 8월, 무조건 지리산 쌍계사로 떠났다. 법정 스님이 사미계를 받고 은사이신 효봉 스님을 모시고 수행한 곳이었다.


 쌍계사에서 산 위로 사오십 분 더 올라가 불일폭포를 보고 상민 스님은 마침내 출가의 용기를 얻게 되었다.“태어나서 폭포란 걸 처음 보았습니다. 불일폭포를 보고나서 출가할 용기가 왜 생겼는지 잘 모르겠어요. 지금 좀 후회되는 건 왜 처음 출가할 마음이 생겼던 스무 살 시절에 그렇게 하지 못했나 하는 것입니다.”


 ◆ 쏘로우의 근검과 법정 스님의 무소유


 지금은 자취없는 쏘로우의 통나무집을 찾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됐을까. 자연을 사랑한 위대한 인물의 흔적을 더듬으며 인생의 영화(榮華)란 허망한 꿈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았을까. 혹은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에 취해 충만한 사색의 바다를 노저어 갔을까.


 집터 왼편 돌무더기 앞엔 고동빛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쏘로우가 숲에 들어가는 이유를 설명한 글이었다. “나는 인생의 본질적 사실들만을 대면하면서, 진지하게 살고 싶었기 때문에 숲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인생이 가르쳐주는 것을 배우고, 내가 죽게 될 때 삶을 진정으로 산 적이 없다는 걸 발견하지 않기 위해 숲으로 들어갔다.”(쏘로우의 '월든'에서)


 돌무더기에서 조금은 특별한 자갈들이 눈에 띄었다. 연인들이 추억을 남기거나, 사연을 가진 이들이 이름과 날짜를 표기한 것들이었다. 더러는 사랑의 하트도 보였다. ‘언약의 돌’이었다.


 쏘로우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인 엘렌 슈엘이 있었지만 그 집안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했다. 쏘로우가의 진보적인 가풍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는 말이 전해진다. 어쩌면 그것이 상처가 되어 평생 어떤 여자도 좋아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쏘로우는 통나무집에서 사는 793일 간 생존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 이외에는 물건을 사지도, 쓰지도 않았다. 사치품과 편의품 대다수는 인류의 향상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고 보았다. “가장 현명한 사람들은 늘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간소하고 결핍된 인생을 살았다”면서.


 물질적인 풍요와 만족을 추구하는 것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그는 가구도 직접 만들고 호밀과 옥수수를 심었다. 호박이나 사탕무로 당밀 감미료를 제조했고 효모를 넣지 않고 빵을 만들어 먹었다.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일 것이며, 백 가지나 천 가지가 되게 하지 말라.”(쏘로우의 ‘월든’에서)


 그 이의 경구(警句)는 ‘무소유’를 실천한 법정 스님을 연상케 한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함께 한 법정 스님의 글과 쏘로우의 글을 보면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쏘로우는 법정 스님의 전생이 아니었을까.


 상민 스님은 “조촐한 음식에 만족하며 사색과 명상으로 자연을 벗하며 살아가는 쏘로우의 모습을 떠올려 보니 웬만한 수행자보다 훨씬 더 수행자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행동하는 자유인 쏘로우


 천천히 걸어도 한시간 이면 일주가 가능한 월든은 어느 방향에서 봐도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나 월든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연의 교감과 문명의 어리석음을 일깨우고 참자유인으로 살았던 쏘로우에게서 나온다.



숲에 은거했음에도 그는 현실을 도외시하지 않았다. 세금이 식민지 전쟁과 노예제도를 유지하는데 쓰여질 것이라는 사실에 분노한 그는 인두세(人頭稅) 납부를 거부해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도망한 노예가 캐나다로 탈출할 수 있도록 직접 도왔고, 급진적인 노예 해방 운동가 존 브라운이 투옥되었을 때 공개적인 탄원 성명을 발표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 같은 체험을 바탕으로 쏘로우는 “국가가 불의한 일을 개인에 강요해서는 안되며 그러한 국가의 강요를 시민이 거부할 권리를 지닌다”는, 저 유명한 ‘시민의 불복종’을 발표했다. 그의 사상은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터 킹에 큰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 시민 운동과 환경 운동의 위대한 기반으로 자리하고 있다.


 호수를 한 바퀴 돌아 출발점으로 돌아오자 오목한 백사장엔 천진동자같은 아이들이 소리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커다란 비누거품 방울을 만들어주는 할아버지 덕분이었다. 긴 줄이 달린 나무대롱을 바람을 등진 채 지휘자처럼 솜씨좋게 엇갈리면 황소만한 방울부터 작고 영롱한 방울들이 연이어 쏟아져 나왔다.


 어쩌면 그것들은 월든의 호반에서 깨우친 쏘로우의 공기방울이 아니었을까.


 “푸른 초목이 뒤덮인 둑 아래 물 속의 송어처럼 투명한 생각 속에 숨어들고 싶었다. 그렇게 숨어서 물위로 떠오르는 공기방울만으로 길 잃은 사람에게 나를 알리고 싶었다. 우리가 얼기설기 만든 집을 새로운 보금자리로 느끼게 해준 폭풍우를 만난 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쏘로우의 ‘월든’에서)


 출가 전 대학에서 중문학을 전공한 상민 스님은 중국 산둥(山東)사범대학에서 유학하며 대륙을 체험했다. 대학 졸업 이듬해 출가한 스님은 쌍계사 강원에서 학인 신분으로 4년 간 공부하고 2년 간 강사로서 학인 스님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6년을 공부하고 난 뒤 느낀 것은 저는 불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경주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석사 과정을 거쳐 박사 과정을 마치면서 아무리 많은 지식이 있더라도 실천을 못하면 쓸모가 없지 않은가라는 의문이 들더군요. 박사 학위를 취득해서 교수가 되려는 생각도 없었고 순수하게 제가 알고 싶어 하는 진정한 부처님 가르침이 무엇인지에 대한 열망만이 있었습니다.”


 비누 거품이 빚어내는 방울들의 군무 너머로 월든의 해가 뉘엿뉘엿 기울었다. 황홀한 정경에 취한 상민 스님은 “월든 호수를 배경으로 마술쇼 같은 공연을 펼쳐 보여주는 할아버지와 아이들의 얼굴에서 선열과 선정의 기쁨들이 읽혀졌다”고 탄성을 토했다.


 어떻게 하면 실천적으로 수행도 하면서 공부할 수 있을까라는 스님의 오랜 고민은 지난해 여름 한 달 동안 원각사에서 지내면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원각사에서 기도하고 명상하면서 마음이 참으로 평안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뉴욕에 오게 되었고 이렇게 월든까지 만날 수 있었네요. 많은 이들에게 어렵지 않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며 수행의 기쁨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더불어 살아 있는 모든 이들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월든은 단순한 호수가 아니었다.


 160년 전 한 위대한 사상가가 빛나는 통찰력으로 지성과 영감을 불어넣은 월든은 대륙의 광활한 호수들에 견줄 수 없이 미미하지만 쏘로우의 순례자들에겐 지금 이 순간 광대무비한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로 물결치고 있다.


 robin@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