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그녀는 한 달이 멀다하고 불일암을 찾았다. 새벽 첫차를 타고 찾은 암자였지만 그저 잠깐 인사만 하고는 암자 구석구석 청소를 하고 공양도 마다한 채 돌아섰다. 법정 스님이 “번개처럼 왔다가 번개처럼 간다”고 했던 그녀는 그렇게 어떤 말도 없이 한 달에 서너 통의 긴 편지를 스님에게 보낼 뿐이었다. 그리고 스님은 주기적으로 그 편지를 소각했다. 때문에 그녀의 사연을 아는 이가 없었다.
법정 스님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던 그녀 최순희. 그녀는 1952년 초 국군에게 생포돼 지리산을 내려온 후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빨치산 시절의 동료들을 향한 그리움, 그리고 북에 두고 온 아들 때문에 평생을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 갇혀 있어야 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인연을 맺기 전까지 말 그대로 매일이 지옥이었다.
당시 피아노와 성악을 전공한 인텔리 여성이었던 그녀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김영랑, 박종화, 최승희 등 당대 최고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시인 김영랑의 동생 김하식과 결혼 한 것도 그런 인연에서 기인했다. 사회주의자였던 남편을 따라 월북한 그녀는 공훈배우가 됐고, 전쟁이 터지자 광주문화예술총연맹 감독으로 남하하던 중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지리산으로 들었다. 1952년 1월 대성골 전투에서 남부군 문화대원 대부분을 잃고 남은 동료들과 숨어 있다가 생포됐다. 그리고 며칠 뒤, 지리산 빨치산의 자수 권유 삐라에 피아노를 치는 그녀의 모습이 실렸다.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했던 선택은 평생을 따라다녔고, 그녀는 스스로도 그 죄의식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했다.
남부군 문화지도원으로 활동했던 그녀는 그렇게 아픔을 간직한 채 스스로 만든 마음 감옥에 갇혀 살다가 법정 스님을 만나면서 비로소 평안을 되찾았다. 스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녀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는 “스님을 만나 오랫동안 잊었던 마음의 평화를 다시 찾았습니다”라고 한 그녀의 말에서 절절하게 묻어난다. ‘무소유’를 읽고 장문의 편지를 쓴 뒤 무작정 찾은 불일암은 그렇게 그녀에게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이 되었고, 법정 스님은 유일하게 믿고 따를 수 있는 의지처가 됐다.
그녀는 불일암을 오르내리며 허드렛일을 하는 틈틈이 사진기에 그곳의 봄·여름·가을·겨울을 담았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 불일암 사계’는 말없이 불일암을 오르내리며 담았던 낡은 사진 속 오래된 풍경에 법정 스님의 글을 함께 엮었다. 사진 속에 법정 스님은 보이지 않아도, 스님의 손길과 눈길이 머물렀을 꽃과 나무, 암자와 산, 그리고 햇빛까지 모두 담아냈다. 스님을 향했던 그녀의 존경과 사랑이 빚어낸 마음의 형상이다.
불일암을 오르내린 지 15년 되던 1994년 비매품으로 소량만 펴낸 ‘불일암 사계’에는 자신의 삶을 더듬고 마음을 추스르는 동안 틈틈이 카메라에 담았던 그곳의 사계절이 담겼다. “법정 스님과 대화를 나눈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행여 수행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 눈에 안 띄는 곳만 찾아 바람처럼 그림자마냥 그렇게 다녀왔을 뿐입니다. 맑고 투명하게 살아가시는 법정 스님의 면모를 접하는 계기가 된다면 더없는 기쁨이겠습니다”고 했던 그녀는 스님을 만나고 불일암을 오르내리며 아픈 삶을 치유하고 2015년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새롭게 펴낸 이 책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 불일암 사계’는 그녀가 찍은 오래된 사진과 ‘(사)맑고 향기롭게’에서 사진에 어울릴만한 법정 스님 글을 뽑아 함께 엮었다. 때문에 근현대사의 아픔을 상처로 안고 살아야 했던 한 여인과, 그 상처를 묵묵히 어루만져주었던 스님의 아름다운 만남이 소박한 사진과 법정 스님의 글을 통해 수채화처럼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부모가 최순희와 함께 남부군으로 활동했던 인연으로 오래전부터 그녀를 알고 지냈던 소설가 정지아가 짧지만 강렬한 필치로 그려낸 몇 편의 글이 책의 무게와 감동을 더해준다. 1만4000원.
심정섭 전문위원 sjs88@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