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과 비움
얼마 전 뮌헨에서 독일 여성 두 명이 한 대형매점이 유통기한이 지나 쓰레기통에 버린 식품을 수거하다 고발당해 약식재판을 받았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려 했으나 절도죄에 걸려 330유로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유통기한은 지났지만 먹어도 건강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식품이었다. 독일에서 이렇게 버려지는 식품이 한 해 동안 무려 1100만t에 달한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법개정을 서둘러 그러한 식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여론도 분분해졌다. 프랑스에서는 이미 3년 전부터 대형매점이 멀쩡한 식품을 폐기처분하다 적발되면 건당 3750유로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이 소식을 들으면서 나는 젊은 시절 김지하 시인이 남겼던 시 하나를 문득 떠올렸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동시에 이 시의 토양을 제공한 무위당(无爲堂) 장일순 선생과 ‘한살림’ 공동체를 이끌었던 박재일 선배를 떠올렸다. 안타깝게도 두 사람 모두 이 세상 사람은 아니다. 같은 길을 아직도 꾸준히 걸어가는 절친한 ‘농부철학자’ 윤구병이 있다. 변산공동체에 이어 지금은 민통선 평화마을을 꾸리는 일에 골몰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앞서 언급된 두 사람과 김지하 시인이 동학과 노장사상에서 생명과 공동체적인 삶의 원류를 읽었다면, 농부철학자는 스피노자의 범신론적인 자연관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서울을 떠났던 1960년대 중반은 정말 끼니를 때우는 일이 문제였던 시절이다. 8억명 이상의 세계인구는 극도의 기아에 여전히 시달리고 있다. 이제 한국에서도 엄청난 양의 식품폐기로 인한 자원낭비가 사회적으로 문제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시민운동도 있다고 들린다. 그동안 한국의 소비생활 형식도 미국이나 서유럽의 그것과 많이 비슷해졌으며 과잉소비를 해야 돌아가는 사회체계 안에서 모두들 바삐 살고 있다.
자본주의 역사가 긴 사회에서는 이런 성장모델에 내재하는 모순에 대한 비판과 대안추구가 다양했고 그의 내력 또한 길었다. 성장과 소비 우선에 대한 반성은 1972년에 발간된 로마 클럽의 ‘성장의 한계’를 통해 종합적으로 표출되었다. 이른바 68혁명의 좌절에 이어 온 두 차례에 걸친 유류파동에 의해 촉발된 ‘녹색’운동은 이 가운데 가장 돋보였다. 이런 발상과 사회적 실천은 그 후 정치·경제적인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 생활세계의 거의 모든 부문으로 확산되었다.
국내총생산으로 파악되는 성장의 개념 대신에 지속 가능성, 그간에 이루어진 현대화를 반성하는 성찰적 현대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이미 친숙한 개념이 되었다. 얼마 전부터는 미니멀리즘이나 축소성장(decroissance/degrowth)이라는 삶의 새로운 형태를 논의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운동이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다. 원래 1960~1970년대 미국에서 미술과 음악, 그리고 문학에서 복잡한 기교 대신에 예술의 본질적인 요소만을 단순하게 전달하는 미니멀리즘이 최소화된 소비생활을 지향한다는 의미로도 전용되었다. 1990년대 초부터 프랑스에서 시작된 축소성장운동은 소비생활의 철저한 자제 없이는 제한된 자원을 가진 지구촌의 미래는 없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이 성장이 가져오는 풍요 속에 나타난 낭만적이며 세기말적인 반동이자 풍요와 쾌적함을 추구하는 인간본성을 거스르는 사고와 행동이라는 비판도 있다. 근자에 많이 논의되고 있는 곤도 마리에의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처럼 탈성장의 의미가 아주 제한적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대량소비사회에서 방 안에 계속 쌓아놓은 물건더미 속에서 허우적대는 현대인에게 정리된 삶을 어떻게 꾸릴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지만 정작 문제의 핵심인 과도한 소비행위에 대해서는 대안 제시가 없다.
폴란드 출신의 영국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소비주의의 본질이 특히 소비자 스스로가 소비를 통해 자신을 과대포장하려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 개인이 그의 희망과 욕망, 그리고 행동양식을 통제하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강요된 구매자의 위치로 전락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디 더 이상 나눌 수 없다는 뜻을 지녔던 개인은 사라지고 통제된 사회 안에서 단지 소비하는 집단의 성원으로서 살아간다.
지구화시대 시민운동의 여전사로 불리는 나오미 클라인이 제기한 ‘노 로고(No Logo)’ 운동이나 칼레 라슨이 시작한 캠페인 ‘월가를 점령하라’와 ‘아무것도 사지 않는 날’은 깨어난 시민들이 이런 모순에 적극적으로 저항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반소비주의운동이 전투적인 근본주의와 과도한 규범주의에 갇혀 있다는 비난의 소리도 들렸다. 그래서 개인의 각성에 호소하고 절제와 나눔의 생활을 일깨우는 사고의 조용한 혁명이 강조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프란치스카너 수도승이 실천했던 철저한 금욕과 규율에 복종했던 삶을 최근에 다시 조명한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의 최근 저서 <최고의 빈곤>이 있다. 자신의 삶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세계 안에서 함께 살면서 절제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도 무위자연(無爲自然)을 가르친 노장사상과 불교의 공사상(空思想)이 마찬가지로 우리를 소비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 인도한다. ‘성인은 쌓아두지 않는다. 이미 남을 위해 다 사용하였으나 쓰면 쓸수록 자기에게는 더 있게 되고, 이미 남에게 다 주었으나 주면 줄수록 자기에게는 더욱 많아진다’를 가르친 <도덕경>,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묘행무주(妙行無住)와 일상무상(一相無相)의 세계를 밝힌 <금강경>이 나눔과 비움의 덕을 비춘다.
집단적인 운동이거나, 아니면 개별적인 자성을 통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량소비사회의 모순을 직시하고 지금까지 관성적으로 이어온 생활양식을 바꾸지 않고서는 우리가 사는 유일한 행성인 지구는 인간이 쌓아놓은 쓰레기더미 속에 결국 묻히게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세계은행이 최근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세계 인구의 16%만이 살고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된 한국을 포함한 이른바 선진산업국은 세계 쓰레기의 3분의 1을 생산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2050년에는 세계 쓰레기의 양이 오늘보다 70% 정도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공간이나 여백은 그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과 여백이 본질과 실상을 떠받쳐주고 있다”는 법정 스님의 말이 그래서 과잉소비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의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