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태 작가. 강성만 선임기자
“인제는 내 맘대로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지금 미수가 되고서야 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올해 만 88살인 최종태 조각가가 지난해 초 미술잡지에 발표한 글 ‘예술가의 고백’ 중 일부다. 글의 부제는 ‘자유를 만나기까지’이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성상 조각가다. 성모상 등 한국의 전통적 미감이 녹아든 그의 종교 조각은 한국 교회 미술의 토착화에도 기여했다는 평을 듣는다. 문재인 대통령이 재작년 프란치스코 교황을 방문할 때 선물로 들고 간 작품도 그의 조각 두 점이었다. 20년 전엔 고 법정 스님 부탁으로 성모 마리아를 닮은 관음상을 만들어 사찰 길상사에 세웠다.
지난 4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 자택에서 만난 작가는 아흔을 앞두고 찾은 자유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재작년 12월 자유롭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한 달 뒤 글을 썼죠. 몇 년 전부터 (자유가) 왔는데 ‘아차 이거다’ 하고 알게 된 거죠. 불교 말로 (도를 천천히 깨치는) ‘점수’입니다. 쉰 무렵 영적 체험을 하며 ‘조각은 모르는 거다’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부터 38년 세월이 걸렸어요. 일찍 죽었다면 (자유를) 못 만났겠죠.”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기도 한 작가는 최근 에세이집 <최종태, 그리며 살았다-한 예술가의 자유를 만나기까지의 여정>(김영사)을 냈다. 일흔 이후 예술과 종교 그리고 삶을 주제로 여러 매체에 쓴 글을 모았다.
노작가가 말하는 자유는 이런 거다. “전에는 머릿속에 피카소와 마티스 같은 세계미술사의 거장들이 있었어요. 그들이 연필로 머리로, 내 몸에 작용했어요. 그들의 좋은 것이 내 작업에 영향을 주었죠. 점점 영향이 약해지더니 이제는 없어요. 내가 지금은 아이들처럼 그려요. 아이들은 머리에 들어간 게 없어 본대로 그립니다. 어른은 머릿속에 있는 게 작용해 본대로 못 그리죠. 요즘은 누가 뭐래도 내 맘대로 그려요. 자유를 찾아 편하고 좋아요.”
자유롭게 그린 그림이 맘에 드냐고 하자 그는 “좋은 작품은 우선 자유로워야 한다. 그게 기본이다”고 했다. ‘자유를 조금 일찍 만났다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그거야말로 타고난 거죠.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 바빠요. 마음이 바빠요. 손이 한계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천천히 해야죠.”
최종태 작가가 우리 나이로 여든여덟 미수에 자유를 만나 그린 그림이다. 제목은 ‘모자상’. “애초 이번 책 표지로 ‘모자상’을 쓰려고 했어요. 출판사에서 너무 종교 냄새가 난다고 해서 다른 걸 택했죠. 대신 이 그림으로 엽서를 만들었어요.” ‘모자상’은 작가의 집 거실에 걸려 있었다. 집 주인의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김영사 제공
<최종태, 그리며 살았다> 표지
작가로 가장 힘들었던 일은 스승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단다. 서울대 미대 은사인 고 김종영 조각가와 고 장욱진 화가의 그늘에서 빠져나오는 데 20년 이상 걸렸단다. “두 분의 생각과 작품 형태가 나를 점령했죠. 나도 그게 좋으니까 옳다고 여겼죠. 작품을 하다 보면 닮아있어요. 두 선생 속에 세계미술사가 다 들어있으니까요.” 어떻게 벗어났을까? “알아야 됩니다. 매일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이 공부입니다. 일하다 보면 하루에도 수십 바퀴씩 이집트 그리스 로마 등 세계미술사가 내 머릿속에서 맴돌아요. 이젠 생각하더라도 작용을 안 합니다. 다 있으면서 없는 거죠. 비운 거죠.”
지금도 ‘세계미술사’에 짓눌리고 있는 후배 작가들은 어떻게 해야 하냐고 하자 그는 “세계미술사 5천 년을 단 몇 달 만에 벗어날 수는 없다”며 추사 김정희를 말했다. “추사가 대단해요. 그는 ‘다 배우고 배운 것을 버려야 한다’고 했어요. 오직 내 법으로 그려야 한다고요. 추사도 제주에 유배 가 예순이 됐을 때 그런 생각을 했죠. 우리 역사에 그런 사람이 없어요.”
그는 지금도 오전 5시30분이면 자택에 마련한 작업실로 향한다. “새벽 4시쯤 깨면 조금 뒤 작업실로 가요. 어제 했던 게 궁금해 참기 힘들어요. 비닐을 들추고 흙에서 의심난 부분을 살펴요. 그러다 눌러앉아 작업합니다. 대략 오후 5시30분쯤 끝나죠.”
구순을 지척에 둔 나이의 ‘조각 노동’이란? “요령이 생겨 힘에 맞춰서 해요. 흙과 나무를 합니다. 동은 못 하죠. 흙은 앉아서 떼어 붙이니 괜찮아요. 나무는 망치나 무거운 톱을 써야 하니 힘에 부쳐요.” 편한 점도 있단다. “요 몇 년 전부터는 머리로 고민하기 전에 손이 먼저 흙을 붙여요. 60년 동안 흙을 만지니 어떻게 작품을 해야 할지 손에 입력돼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일하는 게 편해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없어요.”
“김종영·장욱진 ‘스승 그림자’ 20년”
지난해 ‘자유’ 깨닫고 미술잡지 ‘기고’
88살 맞아 ‘최종태, 그리며 살았다’ 내
“쉰살 ‘조각은 모르는거다’ 38년만에”
매일 오전 5시30분부터 작업실 ‘몰두’
“소녀상…더 완전한 순결까지 길 멀어”
그는 창작의 대부분 기간 소녀 모습을 깎고 그렸다. “어떻게 소녀상을 시작했는지 잘 몰라요. 내가 체질적으로 순결, 순수, 깨끗한 것에 뭐가 있었나 봐요.” 1965년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83호)을 본 게 창작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단다. “반가사유상을 보고 그 불상과 같은 방향으로 가자고 결심했죠.”
법정 스님의 부탁으로 제작한 길상사 관음상. 성모 마리아를 닮은 관음이다. 최종태 조각가는 요즘도 해마다 4차례 정도는 길상사를 찾아 이 관음상을 만난단다. 사진 이종승
최근 몇 년은 ‘기도하는 사람’만 만들었다고 했다. 이유가 흥미롭다. “똑같은 조각을 계속하다 보면 손을 어디에 둘지가 가장 어려워요.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은 못 만들겠더군요. 그렇게 만들 이유를 못 찾았어요. 그래서 이리저리하다 기도하는 손이 됐어요.” 설명이 이어졌다. “나는 조각 작품도 세상 사는 것과 다 관계가 있다고 봐요. 그리스 로마 조각에는 손을 들고 있는 게 있어요. 세상 사는 것과 관계없이 형태미만을 추구한 조각이죠.”
그는 1958년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세례를 받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1996년부터 10년 가까이 한국가톨릭 미술가협회 회장도 지냈다.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계기가 흥미롭다. “대학 4학년 때 반야심경 등 불교 강의를 찾아 들었어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답을 찾지 못하겠더군요. 불교 강의를 들은 어느 날 친구가 가지고 있던 성경을 우연히 펴 쭉 읽었는데 하룻저녁에 다 봤어요. 뜻이 다 들어오더군요. 기적이었죠. 불경을 읽었는데 성경이 읽힌 거죠. 이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40년 숙제였는데 법정 스님을 만나 풀었어요. 스님이 그래요. 최 선생이 그때 경을 읽는 눈이 열렸다고요. 이 경이나 저 경이나 다르지 않은 거죠.”
그는 아름다움과 하느님은 하나일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교수 시절 학생들이 어떤 게 좋은 작품이냐고 물어요. 그래서 하느님이 좋아하는 형태라고 답하니 학생들이 웃더군요. 절대 진리가 좋다고 하면 좋은 것 아닌가요.”
종교와 예술은 한 뿌리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가 한국 전통 예술 가운데 최고로 치는 것도 불교 예술인 삼국시대 조각과 고려 불화다. “세계 불교 작품 가운데 삼국 시대 조각만큼 잘 된 게 없어요. 고려 불화는 세계 불화 중 단연 탑(최고)입니다.”
소녀상과 다른 형태를 생각해보지 않았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녀상도 해결하지 못했어요. 더 완전한 순결과 깨끗함에 도달해야죠. 갈 길이 멀어요.”
‘아름다움이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작품을 통해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이다. “괴테나 도스토옙스키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예술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요. 소설 <레미제라블>을 쓴 빅토르 위고도 그렇고요.” 말을 이었다. “유럽이 제1차, 2차 대전을 거쳤지만 예술가들이 세상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 ‘사색하고 행동하고, 행동하고 사색해야 한다’며 행동을 강조했는데 요즘도 행동하는 철학자나 예술가는 잘 보이지 않아요. ‘예술을 위한 예술’은 내가 가는 방향과 다릅니다.”
그는 세계미술사에서 인류 구원의 메시지를 편 대표적인 작가로 프랑스 화가 조르주 루오(1871-1958)를 꼽았다. “루오가 전쟁 전에 불쌍한 사람들을 그린 판화연작집 <미제레레>를 냈을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어요. 미제레레는 구약 시편 51편의 첫마디로 ‘불쌍히 여기소서’란 뜻입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프랑스 신부 알랭 쿠튀리에(1897∼1954)가 70대 중반이 된 루오에게 성당 그림을 맡깁니다. 볼 때마다 감격하는 그림입니다.”
최종태 작가가 작업실에서 자신의 손이 닿길 기다리는 나무를 바라보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최근 작업 중인 소녀상 조각 옆에서 최종태 작가가 사진을 찍고 있다. 그는 자신의 소녀상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소녀상은 주먹이 아니죠. 행태가 다 곡선입니다. 어디론가 휘어 있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조각가인 그가 ‘삶의 기둥’으로 삼은 작품은 뜻밖에도 소설이다. 비참한 사람들이란 뜻인 빅토르 위고 소설 <레미제라블>이다. “대전사범을 다닐 때였어요. 한국어 소설이 없던 시절이었죠. 그때 전주사범을 나온 삼촌이 책을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삼촌 책인 <레미제라블> 일어판을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방학 때면 읽었어요. 스토리를 따라 읽다가 3학년 때는 완독했죠. 내 인생의 기반이 된 책입니다. 세상에 사랑과 평화의 향기를 안겨준 책이죠. 그 책 앞에는 인생의 세 가지 문제가 싸우는 것과 이기는 것 그리고 죽는 것이라는 짧은 시가 있었죠. 이 시를 가끔 생각하는데 역시 옳아요.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도 조각가 자코메티 전시 팜플렛 글에서 ‘그는 승리하고 있다’고 했죠.”
그는 책에 좋은 사람이 좋은 그림을 그린다고도 썼다. “당연한 거죠. 어떻게 나쁜 사람이 좋은 그림을 그려요.” 이 말끝에 대학을 졸업하고 조선 미술 공부에 매진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일본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한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집 도록을 국립도서관에서 빌려 다 봤어요. 그런데 어떤 작가들은 한두 번 특선을 한 뒤 더는 출품하지 않더군요. 허백련, 변관식, 박승무, 노수현 선생이 그랬어요. 반면 김은호, 이상범 선생은 계속 출품해요. 나중에 노수현 선생에게 왜 출품을 계속하지 않았냐고 물으니 그래요. ‘일본 사람들이 처음에는 조선 미술 발전을 위해 한다고 했는데 하다 보니 아닌 것 같아 빠졌다’고요. 일본 사람들이 심사하고 그러면서 동양화는 없어지고 일본화가 됐잖아요. 그때 깨달았어요. 사는 것을 바로 알아야겠다고요. 사는 것과 예술은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했죠. 일제가 36년 동안 조선정신 말살정책을 폈어요. 미술대와 음악대를 만들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죠. 조선 정신과 관련되니까요. 그래서 난 선전(조선미술전람회) 시대의 예술을 믿지 않아요. 정신이 잘못됐는데 어떻게 그림이 나올 수 있겠어요. 그때 조선 미술에 공백이 생겼어요. 그런 생각을 한 뒤로 맥이 끊긴 조선 미술과 현대와 이으려고 노력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