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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 22-11-21

    [매일경제] 길상사吉祥寺-속세와 탐욕, 경계가 사라진다 2020.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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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의 사회가 상당히 혼란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일부 사람들만의 생각이 아니다. 단체는 물론이고 개인까지도 모두 목소리를 높이는 세상이다. 누군가는 ‘이것이 진정한 민주주의’라고도 말하지만, 대다수는 ‘우리 사회에 큰 어른이 없다’는 데 동의하며 이미 세상을 떠나신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스님을 소환하기도 한다. 약한 자, 가난한 자, 핍박받는 자를 위해 촛불을 켜고 기도하던 두 분의 존재가 새삼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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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2월14일,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성북동의 길상사 개원 법회에 참석해 축사를 하셨다. 법정스님 역시 1998년 2월24일 명동성당에서 법문을 말씀하셨다. 다른 종교 행사에 기꺼이 참여해 기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자세야말로 ‘큰 어른’의 모습임에 틀림없다.”

길상사는 지하철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를 나와 마을버스를 타면 된다. 사찰에는 여느 사찰에 다 있는 천왕문이 없다. 경내는 극락전, 지장전, 설법전, 진영전 등의 전각과 청향당, 길상헌 등의 요사채가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관음보살상이다. 법정스님이 천주교 신자이자 가톨릭 예술가인 최종태 작가에게 요청해 만들었는데, 그 외모와 미소가 성모 마리아상을 연상시킨다. 종교 간의 화합을 기원하는 작품이다.

길상사의 이름은 ‘길하고 상서로운 절’이란 의미이다. 길상사가 자리한 곳은 바위 사이에 맑은 물이 흐르는 배밭골이었다. 이 땅을 1955년 사들여 대원각을 지은 김영한은 이후 많은 재물을 모았다. 그는 1987년 법정스님의 말씀을 담은 『무소유』를 읽고 감명받아 법정스님에게 대원각을 절로 청하였다. 법정스님은 거절했지만 김영한은 10년간 법정스님에게 청해 결국 1997년 12월 대원각은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창건되었다. 이 자리에서 김영한은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한 벌과 ‘길상화吉祥華’라는 불명을 받았다. 김영한은 “나 죽으면 화장해서 눈이 많이 내리는 날 길상사 뜰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1999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법정스님은 정기 법회를 열어 좋은 말씀을 남기시다 2010년 3월 길상사에서 입적하셨다.

길상사에서는 자연스럽게 법정스님은 물론이고 김영한의 생을 더듬게 된다. 1916년 태어난 김영한은 16세에 ‘진향’이란 이름으로 기생에 입문한다. 그녀의 재주를 아낀 지인들의 권유로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귀국한 뒤 함흥여자고등보통학교 영어 교사인 백석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두 사람은 불꽃처럼 사랑을 한다. 백석 집안에서는 아들을 불러 강제로 혼인시키지만 백석은 서울로 도망쳐 김영한을 만난다. 백석은 김영한에게 러시아로 가자 하지만 김영한은 백석에게 짐이 되는 것이 싫어 몸을 숨기고, 백석 홀로 러시아로 간다. 이후 해방이 되고 백석은 북한에, 김영한은 남한에서 서로를 만나지 못하는 처지가 된다.

“1000억 원이란 거금이 아깝지 않느냐?”는 물음에 “1000억 원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백석의 시와 모든 것을 사랑했던 김영한. 백석은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아명과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를 주었다.

시인 백석과 김영한의 사랑이 길상사에 핀 상사화에 맺혀 있는 듯하다. “아무 것도 안 가지는 것이 아닌 불필요한 것을 안 가지는 것이 무소유”라 말씀하신 법정스님과 김영한의 인연 또한 그 깊이가 가늠이 안 된다. 법정스님의 말씀 중에 지금 우리를 위로하는 구절이 있다.

‘꽃이나 새는 자기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저마다 자기 특성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우주적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살려고 한다. 홀로 있다는 것은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고 자유롭고 전체적이고 부서지지 않음이다.’ 길상사에서 생각이 깊어지고 눈은 맑아진다.


[글 장진혁(프리랜서) 사진 아트만텍스트씽크]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47호 (20.09.22)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