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몹시 부끄러움을 아는 세상
김용락 전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 원장·시인
백신 1차 접종을 하고 컨디션이 떨어져 며칠간 집에서 누워 있다시피 쉬었다. 집 안을 어슬렁대다가 책장 구석에 꽂혀 평소 눈에 안 띄던 책을 한 권 발견했다. 법정 스님이 쓴 '인도기행'(초판, 1991)이었다. 이 책은 지난 2010년 법정 스님이 돌아가시면서 시중에 있는 자신의 책을 모두 없애라고 유언했다는 언론 기사를 보고, 내가 부랴부랴 시중 서점에 나가서 눈에 띄는 대로 법정 스님의 모든 책을 싹쓸이 사 담을 때 휩쓸려 온 책 중 한 권이었다. 평소엔 관심 없다가 없애라는 유언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법정 스님의 책을 다 사 모았다. 이것도 일종의 욕망이라면 왜곡된 욕망일지도 모르겠다.
1970년대 중반 고교 시절 나는 대구 비산동 오스카극장 앞에서 수도산 기슭에 있는 모교까지 자전거로 등하교를 했다. 지금은 교통이 복잡해 어렵지만 그 당시만 해도 대구는 그 나름 널널한 시골의 풍모가 남아 있었다. 힘차게 페달을 밟다가 힘들면 잠시 내려서 손으로 자전거를 끌고 가기도 했다. 그때 반고개네거리 구 한독병원 옆에 조그만 동네 서점이 있었다. 바깥 유리창에 먼지가 뽀얗게 끼어 있었고 진열대에 누워 있는 책의 먼지를 먼지털이(총채)로 수시로 털던 중년 아저씨가 서점 주인이었다.
1976년 어느 날 자전거를 끌고 가다가 그 서점에 들어갔더니 마침 새로 나온 신간이 말쑥한 얼굴로 진열대에 누워 있었다. '무소유', 법정 스님의 수필집이었다. 그날 나는 범우 문고판의 이 책과 김형석 교수의 삼중당 문고판 '영원과 사랑의 대화' 두 권을 샀다. 아마 값싼 문고판이 아니었다면 형편이 어려운 고등학생의 호주머니로는 못 샀을 것이다. 이후 이 서점에서 나는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 사고, 박완서의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라는 책도 구입하면서 나 나름 찬란한(?) 청소년기 독서 생활을 이어 갔다.
시골에서 유학 온 가난한 학생이어서 아마 '무소유'라는 책의 제목이 눈에 띄었고, 도시 학생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학업 성적에 주눅이 들어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라는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내가 무소유 대신 '강철왕 카네기' 같은 책을 손에 잡았더라면 지금처럼 가난한 시인이 아닌 재벌급 부자가 되어 있을라나?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법정의 '인도기행'은 단순한 인도 풍물 여행기가 아니라 인도의 불교 유적지 순례기와 같은 글이다. 법정 스님 특유의 담백한 문장이 잔잔한 책인데 나는 이 책의 뒷부분 어느 페이지에 오래 눈이 멈췄다. 마하트마 간디가 마지막으로 거처했던 집을 방문하고, 생전 간디가 거처했던 방이 수도승의 거처보다 훨씬 간소한 데 놀라면서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아 몹시 부끄러웠다는 구절이다. 나는 지금 어떤가? 하고 나 자신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나는 법정 스님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서울 성북구 길상사에서 한 번 가까이서 친견한 행운이 있었는데 그날 스님께서 오대산에서 내려오시면서 1천500cc 소형차를 손수 벌벌 떨면서 운전해 오시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놀란 적이 있었다. 당시 법정 스님의 세속적 명성이나 인세 재벌급의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위치를 생각해 보면 그런 스님의 모습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소박하고 겸손한 모습이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많은 대권 후보들이 공통적으로 국민들에게 경제적 풍요와 공정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종교인이든 정치인이든 학자든 장삼이사든 간에 자신의 재산이 너무 많다고 느껴 '몹시'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많아지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출처 : 매일신문(https://news.i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