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향기롭게가 장학 사업을 하는 이유는….
“돈 때문에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도와 사회에 더 기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불교에서는 인재를 육성하는 일을 인재불사(人材佛事)라고 하는데, 바탕에는 세상을 바꾸는 데 교육의 역할이 크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또한 장학 사업에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조건 없는 베풂)도 들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길상사는 고 김영한 여사가 법정 스님께 무주상보시를 함으로써 생겨난 절입니다. 법정스님은 1970년대 초 서울 강남 봉은사 다래헌에 기거하실 때부터 어려운 학생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지원했습니다. 누구에게 얼마를 지원했는지 큰스님(법정 스님)만 아시는데 무소유와 어려운 이웃을 자비심을 발휘해 도와주고 이끌어 간다는 동체대비를 실천하신 것입니다.”
맑고향기롭게의 장학 사업은 공식적으로는 맑고향기롭게의 발족과 함께 시작됐다. 1999년부터는 김영한 여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맑고향기롭게-길상화(김영한 여사의 불교식 이름) 장학생’이란 명칭으로 고등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이때까지 수혜자는 771명이었고 지급 액수는 10억6000만 원이었다. 맑고향기롭게 장학금은 2019년 고등학교 3학년까지 무상교육이 확대됨에 따라 명칭을 2020년부터 ‘맑고향기롭게 대학 장학 사업’으로 바꾼 후 대학생만 지원하고 있다. 2022년까지 총 12억여 원이 장학금으로 지출될 것으로 예상된다. 2021년부터는 본인 또는 가족이 불교 신자이면서 법정 저소득층 및 소득구간 5구간 이하, 직전 학기 평균 B학점 이상인 학생들을 선발해 연 300만 원의 장학금을 졸업 때까지 지원한다.
법정 스님이 살아 계실 때는 종교를 가리지 않고 도와주었는데 지금은 불교 신자로 한정해 지급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대학생 대상으로 장학금 지원을 바꾸는 과정에서 불교 장학금이 거의 없다는 걸 알고 불교계도 인재 육성에 나서고 있다는 걸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장학금이 법정 스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장학금을 받는 학생 가운데 일부는 큰스님이 어떤 분이고, 정신이 무엇인지 모르는 대학생들도 있었습니다. 불교 신자가 비신자보다 맑고향기롭게의 설립 취지에 공감하고 실천하는 데 더 적합하다는 의견도 반영했습니다.”
맑고향기롭게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교육관은 무엇입니까.
“인성 교육이 중시돼야 합니다. 우리 교육은 입시 위주, 암기 위주인데 이런 식의 교육으로는 세상의 어려움에 아파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마음이 나올 수 없습니다. 맑고향기롭게의 모토 가운데 하나인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는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성 교육이 이뤄지면 공감 능력과 사회성, 창의성이 길러집니다. 큰스님이 살아계실 때 한 신도가 자녀를 데리고 온 적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그 신도에게 ‘누구(신도의 자녀)는 사시에 합격하면 안 된다’고 야단을 치셨습니다. 스님 보시기에 인성이 안 된 상태에서 법전만 잘 외워서 판검사가 되면 사람 잡는다고 생각하신 것이지요. 토론 교육도 중요합니다. 인도 오르빌의 학교에서는 토론을 중시하는데 남의 의견을 비판하지 않는 것이 전제입니다.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설득을 통해서 관철시켜야 하는데 수용 여부는 논리성도 중요하지만 주장하는 이의 인성도 중요한 고려 요소입니다. 제대로 된 토론을 하려면 노력을 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창의력도 늘어납니다.”
인성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모와의 교감이 중요합니다. 집은 있는데 가정이 없고, 가정은 있는데 가족이 없고, 가족은 있는데 식구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집안에 살지만 서로 공감하는 게 없기에 한 집안에서도 각각의 삶을 살고 있는 데서 나오는 현상입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밥상머리에 앉아 대화를 해야 합니다.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 이해할 수 있고 응원할 수 있습니다. 이게 공감 능력입니다. 공감을 위해서는 사고해야 합니다.”
스님은 방학 때마다 여섯 상좌들과 나흘간 지내면서 밥상머리 교육을 하는 것도 서로를 알아가면서 공감을 위한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상좌들은 스승에 대해 알고 왔지만 스승은 상좌들이 누구인지 모른 채 지내면 껍데기 관계가 된다는 것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는 믿음으로 연결돼야 하고 그런 스승만이 제자의 허물을 고칠 수 있기에 밥 먹는 태도, 합장하는 법 등 소소한 교육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님은 “스승이 제자를 끝까지 책임지려면 제자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아야 응원할 수 있기에 목욕도 같이하고 여행도 하면서 소통한다”고 했다. 스승이 상좌들과 1년에 두 차례씩 같이 지내는 것은 법정 스님 때부터 시작한 불일암만의 전통이다.
법정 스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강조하셨습니까.
“자기 질서를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가자로서 자기가 세운 약속을 어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홀로 사는 수행자가 병이 오는 것은 자신과의 약속을 깼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스님은 지금도 오전 3시 40분 기상, 4시 예불, 6시 아침 공양, 오후 불식(不食)을 지키고 있다.
불일암 앞마당에는 김장을 위한 배추, 무가 파종돼 있었고 불일암 국수가 만들어졌던 샘물도 그대로다. 법정 스님은 방문객을 위해 갓 삶은 면을 이 샘물에서 헹군 후 간장과 매실청, 푸성귀가 전부인 국수를 대접했었다. 고즈넉한 산사에서 법정 스님이 직접 만든 국수를 먹는 분위기가 한몫했겠지만 불일암 국수는 천하일미라는 수식어로 회자됐었다. 덕조 스님도 법정 스님과 같은 방식으로 국수를 만든다.
법정 스님이 이름을 붙인 나무로 만든 ‘빠삐용 의자’도 그 자리에 있지만, 바로 앞 법정 스님의 유해가 묻힌 후박나무는 12년 사이 훌쩍 자랐다.
성적만을 중시하는 교육과 부모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 바닥부터 시작하는 청년들이 힘들어 하는데….
“어려운 처지에 놓인 청년들을 생각하면 참 안타깝습니다. 일차적인 책임은 정치와 행정에 있다고 봅니다. 좌절한 이들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법·제도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합니다. 어디서든 주인의식을 갖고 사는 수처작주(隨處作主)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남들에게 보기 좋다고 해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으면 합니다. 남을 의식하지 말고 나답게 즐겁게 살기를 권합니다. 대신 남의 허물도 보지 말고, 나 자신이 저지른 허물과 게으름을 보고, 내가 머무는 곳의 주인이 되면 나는 행복합니다.”
순천=글·사진 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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