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마음의 무심’이 되기는 어려워도 걷기 여행은 순간 이동의 마법 부려
[윤한철의 서해랑길 3]
우수영의 아침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했다. 개 짖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명색이 부두가 있고, 길 이름마저 ‘강강술래길’이라는 안내판에다 정겨운 이름의 카페도 있었는데… 면 소재지 중심부로 들어가는 길은 산업화 전 6~70년대 거리를 재현한 세트장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꼭 과거로 돌아가는 것 같은 길모퉁이에서 '법정스님마을도서관'을 만났다. 법정 스님이 이곳 우수영 출신이었다.
작은 돌 언덕 위에 명량대첩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 옆에 강강술래 마당이 널찍하게 조성돼 있고,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가 있었다. 명량대첩비는 일제강점기 때 강제 철거돼 경복궁 내에 버려졌던 것을 지역 유지들이 뜻을 모아 옮겨 세웠다고 했다.
아침 식사를 걱정하며 걷는데, 문을 연 식당이 있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섰더니, 외국인 여성 두 분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중년의 여성은 주방에서 일을 하고 젊은 여성은 홀에서 서빙을 했다. 얘기를 듣고 싶어 말을 걸어봤는데,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어쩌면 대화를 피했는지도 모르겠다. 된장찌개는 좀 묽었지만 짜지 않아 좋았다.
식당 맞은편 찐빵집 아저씨 얘기를 들어보니, 여사장이 먼저 한국에 왔고 뒤에 아들과 며느리를 불렀다고 했다. 두 외국인 여성은 자매지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시어머니와 며느리였다. 식당과 빵집의 주 고객이 농촌 노동자와 노인들이라는 말에도 놀랐다. 변화하는 농촌의 모습이었다. 점심용으로 5천 원을 주고 옥수수빵 4개를 샀다.
비 온 다음 날, 농촌 풍경은 산뜻했다. 짙은 초록의 마늘밭 너머 연초록 보리밭이 정겹고, 그 너머로 서너 채 마을은 그림 같았다. 이런 풍경 속을 걸으면 가슴마저 두근거린다. 나에게 걷는다는 것은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전깃불도 안 들어오는 시골에서 태어나 도시로, 도시로, 도시로 유학 생활을 했고 결국 수도권에 살게 된 삶 자체가 어쩌면 유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본격적으로 걷게 된 것은 은퇴 후부터다. 준비 없이 닥친 은퇴에 급격히 자존감이 떨어져,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극심한 우울증까지 앓게 된 나를 붙잡아 준 것이 걷기 여행이었다. 걷게 되면 생각도 따라 걷게 되고, 그러면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맑아짐이 느껴지고, 그러면 풍경이 더 아름답게 보이고, 들리고, 느껴졌다. 내 몸속의 많은 내가 사라지고 오롯이 몸만으로 자연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았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또다시 내 몸속에는 많은 내가 우글거리게 되지만 걷기 여행 경험은 삶을 여유롭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법정 스님의 말씀처럼 '빈 마음의 무심'이 되기는 쉽지 않지만, 걷기 여행은 잠시나마 나를 무심의 세계로 순간이동 시켜주는 것 같다.
풍경에 취해, 생각 없이 걷다가 그만 길을 놓치고 말았다. 그것도 한참을 지나 바닷가 쉼터에서 알게 되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신발도 벗고, 양말도 벗고, 쉬었다 가기로 했다. 배낭에서 옥수수빵 2개와 우유를 꺼내 주린 배도 채웠다.
출처 : 문학뉴스(https://www.munhak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5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