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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12-20

    [브레이크뉴스] 사람은 가고 기억만 남는가? 함석현 선생을 추모하다! - 24.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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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가고 기억만 남는가? 함석현 선생을 추모하다!

법정 스님 | 기사입력 2024/11/16 [14:55] 

함석헌 선생은 침통한 어조로 말하였다. "나도 젊다면 산속에 들어와서 중이나 되었으면 좋겠소."

 

"사람 목숨 허무해라 물거품일세 80년 한평생이 봄날의 꿈이어라. 인연 다해 이 몸뚱이 버리는 이날 한덩이 붉은 해가 서산으로 진다."

 

1976년 내가 불일암의 시자를 하던 시절, 함석헌 선생(오른쪽) 일행이 다녀가셨다. 왼쪽은 법정 스님.    ©브레이크뉴스

 

고려말 태고화상(太古和尙)의 임종의 노래다. 다른 사람들로는 몇 생을 산다 할지라도 그만큼 살 수 없는 알차고 빛난 생을 누렸으면서도 한평생이 봄날의 꿈같다고 하니, 생명의 덧없음이 우리에게까지 다가서는 것 같다.

 

사람은 가고 기억만 남는가? 함석현 선생님께서 어느 덧 고인이 되셔서 그 기억을 더듬으려고 하니, 새삼스레 삶의 허무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도 언젠가는 자기 삶의 그림자를 이끌고 태초 생명의 그 바다로 돌아 갈 것이지만.

 

함석헌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종로에 있던 사상계 사(思想界 社)에서였다. 사장인 장준하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가, 때마침 나보다 한 걸음 늦게 사무실로 들어오시는 함석헌 선생님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때가 한일국교정상화를 반대하던 6. 3사태가 있던 그해 봄이었다. 그날 동국대학교에 가서 강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하셨는데 꼬장꼬장한 모습이었다. 그무렵 나는 해인사 퇴설당선원에서 정진하던 때였다.

 

두 번째는 함석헌 선생님께서 미 국무성초청으로 도미하기 직전 <뜻으로 본 韓國歷史> 를 다시 손질하기 위해 해인사의 한 암자(金仙庵)에 들어와 계실 때였다. 이 무렵에는 자주 뵙고 귀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한 번은 해인사 큰방인 궁현당(窮玄堂) 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전대중이 말씀을 듣게 된 자리를 갖기도 했었다. 주제는 한국의 종교가 나아갈 길에 대해서였는데, 그 어떤 종파를 가릴 것 없이 매서운 채찍질을 해 주었다. 젊은 스님들한테는 적잖은 일깨움이 되어 주었었다.

 

70년대에 들어서 서울 봉은사 다래헌(茶萊軒) 시절,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씨알의 소리'일로 거의 주일마다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었다. 그때 '씨알의 소리' 편집회의는 주로 면목동(중곡동.?) 전세방에서 살던 장준하 선생님 댁과 신촌의 김동길 박사댁과 내 거처인 봉은사 다래헌으로 옮겨 다니면서 열게 되었다. 어디를 가나 정보기관에서 뒤따라 다녔기 때문에 편집위원들의 신경은 자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봉은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날의 모임에 누구누구가 참석했다고 담당형사가 전화로 상부에 보고중인 장면을 목격한 나는, 홧김에 그 전화기를 빼앗아 그의 면전에서 돌에 박살을 내버렸었다. 그때의 우리들은 피차가 잔뜩 독이 올라 있었다.

 

이런 모임이 아니고도 함석헌 선생님께서는 이따금 우리 다래헌에 들르셨다. 차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샘물을 길어다 차를 달여 마시면서 마하트마 간디며 칼릴 지브란이며 노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다. 미국에 가셨을 때인데, 함선생님을 태우고 가던 택시 운전사가 함선생님 얼굴을 빤히 보더니 칼릴 지브란을 닮았다고 하더란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님께서 <예언자>를 한국어로 번역했다고 했더니 아주 반기면서 정식으로 악수를 청하더라고 하셨다.

 

함석헌 선생님께서 주관하시는 퀘이커모임을 우리 다래헌에서 연 적도 있었다. 나도 그때 한 곁에 앉아 참석하면서 번다한 종교적인 의식이 없고, 마치 참선과 같은 퀘이커 모임을 처음 알게 되었었다. 그 무렵 함석헌 선생님은 노인답지 않게 아름다움 앞에 천진스런 면모를 자주 드러내셨다. 뜰에 피어 있는 꽃을 보면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걸음을 멈추고 눈 여겨 살피면서 꽃에 대한 해박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원효로 집에 그 손 바닥만한 뜰과 온실에 여러 가지 화초를 손수 가꾸셨던 걸 보아도 꽃을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알 수 있다. 한번은 꽃삽과 호미를 가지고 와서 다래헌 곁에 무성하게 자라 오르는 머위를 옮겨 가기도 하셨다. 머위 이파리의 쌉쌀한 그 맛을 좋아하셨다.

 

초파일 때 만든 연꽃등을 우리 방에 달아두었는데, 한번은 그걸 유심히 쳐다보시면서 '거 참 곱다, 거 참 잘 만들었다'는 말씀을 연거푸 하셨다. 가시는 길에 떼어서 드렸더니 어린애처럼 아주 좋아라 하셨다.

 

1975년 가을 내가 거처를 조계산 불일암으로 옮겨오게 되자, 내 산거(山居)에 한 번 오시고 싶다는 서신을 보내왔었다. 오셔서 쉬어가시라는 회신을 이내 보내드렸더니, 15-16인되는 장자모임 회원들과 함께 오시게 되었다. 회원들은 아랫절(송광사)에 묵도록 하고 함석헌 선생님은 나랑 같이 우리 불일암에 올라와 하룻밤 주무시게 되었다.

 

그때 많은 말씀 중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나도 젊다면 산속에 들어와 중이나 되었으면 좋겠소." 그때 어떤 심경에서 하신 말씀인지는 몰라도, 아주 침통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그 무렵 안팎으로 몹시 지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도 중이나 되었으면....' 하시던 그때의 그 말씀이 함선생님을 생각할 때마다 한동안 그림자처럼 뒤따르곤했다.

 

그리고 나는 이때 함석헌 선생님께 두고두고 죄송한 마음의 빚을 지게 되었다. 다 알다시피 함석헌 선생님은 하루 한끼 밖에 안 자셨다. 그것도 저녁을. 그때는 내가 불일암으로 옮겨온 지 얼마 안 되어, 양식은 있었지만 20명 가까운 사람들이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그릇과 수저가 절에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때는 더욱 그랬다.

 

함께 온 회원들에게 그런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밥 대신 감자를 삶아 먹으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다들 좋다고 해서 감자를 한 솥 삶았었다.

 

젊은 사람들은 별식이라 좋았겠지만, 하루 한 끼 밖에 안 드시는 노인이 감자로 끼니를 대신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일이었다. 겨우 두 갠가 드시고는 더 안 드셨다. 이때 일이 두고두고 나를 후회하게 했다. 따로 밥을 지어드려야 했었는데, 융통성이 없이 꼭 막힌 나는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나는 함석헌 선생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예를 드리지 못한 허물을 지었다.

 

그때가 안거중인데다 영결식 날 하필 절에서 예정된 행사가 있어, 인편에만 조문을 대신케 하고 참석치 못하고 말았다. 고인과 유가족께 죄송하고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함석헌 선생님과 같은 큰 어른을 가까이서 모실 수 있었던 인연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한 개인의 삶이란 그 자신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계된 세계를 통해서 거듭거듭 형성된다.

 

이런 사실을 상기할 때 어렵고 험난한 우리시대의 큰 스승으로 우리들 가슴속에서 오래오래 함께 하리라 믿는다.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이 글은 재세 시 법정 스님이 함석헌 선생을 추모하는 글이다. 출처/현장 스님 페이스 북.>

 

*필자/법정 스님.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Do people pass away and only memories remain? Remembering Master Ham Seok-hyeon!

 

- Monk Beopjeong

 

Mr. Ham Seok-heon said in a somber tone, "If I were young, I would have come to the mountains and become a monk."

 

"Human life is meaningless, a bubble. A lifetime of 80 years is a dream of spring. On this day, when I abandon this body after all my fate, a red sun sets over the mountains."

 

▲ In 1976, when I was a disciple of Bul-il-am, Master Ham Seok-heon (right) and his party visited. On the left is Monk Beopjeong. © Break News

 

This is the death song of Taegohwasang (太古和尙) from the late Goryeo Dynasty. He lived a life so rich and bright that others could not live as many lives as he did, but he said that his life was like a dream of spring. It seems that the transience of life is approaching us.

 

Do people pass away and only memories remain? As I try to recall the memory of Professor Ham Seok-hyeon, who has passed away, I cannot help but reflect on the futility of life. We too will one day lead our own shadows back to the sea of ​​life that began in the beginning.

 

The first time I met Professor Ham Seok-heon was at Sasanggye Publishing Company in Jongno. I went to meet the president, Professor Jang Jun-ha, and I happened to run into Professor Ham Seok-heon, who was entering the office a step behind me. It was the spring of that year when the June 3 Incident, which opposed the normalization of Korea-Japan relations, occurred. He said he was returning from a lecture at Dongguk University that day, and he looked very shabby. At that time, I was meditating at Haeinsa Temple’s Toeseoldang Seonwon.

 

The second time was when Mr. Ham Seok-heon was in a hermitage (Geumseon-an) at Haeinsa Temple just before he went to the US at the invitation of the US State Department to re-edit <Korean History in the Light of Intention>. At that time, I was able to see him often and hear his valuable words. Once, I invited him to the main room of Haeinsa Temple, Gunghyeon-dang (窮玄堂), and had a meeting where the whole congregation could hear his words. The topic was about the direction that Korean religion should take, and he gave a fierce whipping to all sects. It was a great awakening for young monks.

 

In the 70s, when I was at Daraeheon (茶萊軒) at Bongeunsa Temple in Seoul, I ended up meeting him almost every Sunday because of the 'National Council for the Protection of Democracy' and 'The Voice of the Seeds'. At that time, the editorial meetings of 'The Voice of the Seed' were held mainly at the house of Mr. Jang Jun-ha, who lived in a rented house in Myeonmok-dong (Junggok-dong?), the house of Dr. Kim Dong-gil in Sinchon, and my residence, Bongeunsa Daraeheon. Since the intelligence agency followed us wherever we went, the editorial committee members' nerves could not help but be tense.

 

This happened at Bongeunsa. I witnessed the scene where the detective in charge was reporting to his superiors on the phone about who was attending the meeting that day, so I snatched the phone away from him in a fit of anger and smashed it on a rock in front of him. At that time, we were both very angry.

 

Even without these meetings, Mr. Ham Seok-heon would occasionally visit our Daraeheon. Since he liked tea, we would often hear stories about Mahatma Gandhi, Kahlil Gibran, and Lao Tzu while drinking tea made with spring water. When he went to the United States, the taxi driver who was taking him stared at his face and said that he looked like Kahlil Gibran. So when he told him that Mr. Ham Seok-heon had translated <The Prophet> into Korean, he was very happy and formally asked to shake his hand.

 

Mr. Ham Seok-heon also hosted a Quaker meeting at our Daraeheon. I sat next to him and attended the meeting, and for the first time I learned about the Quaker meeting, which was like Zen meditation and did not have any elaborate religious rituals. At that time, Mr. Ham Seok-heon often showed an innocent side in front of beauty, which was unusual for an old man. When he saw flowers blooming in the garden, he would not just pass by them without paying attention, but would stop and look at them carefully and talk about them extensively.

 

Judging from the fact that he personally grew various plants in the small garden and greenhouse at his Wonhyo-ro house, we can see how much he loved flowers. One time, he brought a shovel and a hoe and moved the mugwort that was growing luxuriantly next to Daraeheon. He liked the bitter taste of mugwort leaves.

 

When I hung a lotus lantern made during the first day of the lunar calendar in our room, he looked at it carefully and said repeatedly, “It’s so pretty, it’s so well made.” When I gave him some on the way home, he loved it like a child.

 

In the fall of 1975, when I moved my residence to Bul-il-am in Jogyesan, he sent me a letter asking me to come to my mountain retreat. I quickly replied that he would come and rest, and he came with 15-16 members of the Jangja Association. The members stayed at the lower temple (Songgwangsa), and Master Ham Seok-heon came up to Bul-il-am with me and spent the night.

 

Among the many things he said at that time, I still remember the following words. “If I were young, I would like to go into the mountains and become a monk.” I don’t know what he was thinking at the time, but he spoke in a very somber tone. At that time, he seemed to be very exhausted both inside and out. Whenever I thought of Master Ham, the words he had said at that time, “If only I could become a monk…” would follow me like a shadow for a while.

 

And at that time, I felt a deep sense of guilt toward Master Ham Seok-heon. As you all know, Master Ham Seok-heon only slept once a day. And that was dinner. At that time, it had not been long since I had moved to Bul-il-am, and although there was food, there were no plates or spoons in the temple for 20 people to eat at once. It is the same now, but it was even worse then.

 

When I told the members who came with me about this situation, I suggested that we boil potatoes instead of rice, and they all said yes, so I boiled a pot of potatoes.

 

The young people might have liked the special meal, but it was too much for an old man who only ate one meal a day to have potatoes as a meal replacement. He barely ate two and then stopped eating. That incident made me regret it for a long time. I should have cooked a separate meal for him, but I was inflexible and couldn’t think of that because I was so stuck.

 

Another thing is that I made a mistake of not paying my respects to Mr. Ham Seok-heon on his last thorny path.

 

It was during his absence, and on the day of his funeral, there was an event scheduled at the temple, so I sent a messenger to offer my condolences instead and couldn’t attend. I feel sorry and ashamed to the deceased and his family.

 

Looking back, I can’t help but be grateful for the opportunity to have been able to serve such a great person as Mr. Ham Seok-heon up close.

 

An individual’s life is not limited to himself alone, but is formed repeatedly through the world he is related to.

 

When I recall this fact, I believe that he will remain in our hearts for a long time as a great teacher in our difficult and arduous times. May the teacher rest in peace.

 

*Author/Monk Beopjeong.



출처 : 브레이크뉴스(https://www.breaknews.com/107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