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동화작가 정채봉 선생께서 법정 스님을 모시고 해운대에 왔었다. 당시 일본에서 한국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법정 스님이 실존 인물인지 몰랐다. 그 이유는 어리석게 들릴지 모르지만 고등학교 시절 읽은 흰색 표지에 비닐 커버가 싸여 있던 범우사의 수필집 ‘무소유’ 때문이었다. 무소유라는 말은 비폭력이라는 간디의 이념적 슬로건처럼 너무나도 위대한 소박함으로 느껴졌었다. 그게 아니라면 두 분의 트레이드마크인 동그란 안경 때문에 이미지가 오버랩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정채봉 선생께서 스님을 모시고 해운대로 오셔서는 난데없이 사진을 찍어달라는 것이었다. 사진을 찍는 데도 약간의 뜸을 들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저 막 찍어대는 것 같지만 그렇게 하기까지는 충분한 예열 과정이 필요하다. 더군다나 무소유를 주창하시는 높고 귀하신 분을 찍는 일에 어찌 오금이 저리지 않겠는가?
“스님 책을 접한 게 18년 전이었는데, 18년을 기다리니 스님을 이렇게 직접 뵐 수도 있군요.” 어색하게 말문을 열자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 “태평양 바닷물은 태평양에서 만나고 부산 앞바다 바닷물은 부산 앞바다에서 만납니다.” 되돌아온 한마디가 카메라를 든 나를 얼마나 응원해 주던지. 스님을 모시고 서울로 가시던 정채봉 선생께서 되돌아와서 하시는 말씀. “스님은 정말 카메라를 싫어하시는데 김홍희 씨 카메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으시네.”
법정 스님 이야기는 내가 겪은 이야기이고 이번에는 들은 이야기를 하나 해 볼까 한다. 친구가 하루는 존경하는 스님과 차를 마시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스님에게 포장이 잘 된 물건 하나를 내놓으면서 “스님. 볼펜 하나 장만했습니다. 쓰십시오”라며 내놓더라는 것이다. 그러자 스님은 아주 감사히 물건을 받아서는 열어보지도 않고 무릎 밑에 놓아두더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차를 마시고 담소를 하다가 선물을 주신 분이 먼저 자리를 뜨자 무릎 밑에 놔두었던 포장된 물건을 친구에게 건네주며 “이 볼펜 처사님이 쓰세요” 하더라는 것이다.
친구는 송구스럽지만 스님의 말씀이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고 집으로 와서 포장을 뜯어보니 거기에는 고가의 몽블랑 볼펜이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친구는 볼펜을 꺼내 들고 이리 살피고 저리 살펴보면서 이 귀한 물건은 아무래도 자신이 쓸 물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다음 날 다시 포장해서 스님께 전하러 갔다고 했다.
“스님, 포장을 열어보니 그냥 볼펜이 아니라 몽블랑입디다. 제가 쓸 물건이 아닌 것 같아서 다시 들고 왔습니다” 라며 스님께 내밀었더니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어제 그 거사님이 저에게 선물 한 것은 볼펜이지요? 그리니 제가 받은 물건도 당연히 볼펜입니다. 따라서 제가 거사님께 다시 드린 그 물건도 당연히 몽블랑이 아니고 볼펜입니다” 하시며 친구에게 쓰라고 다시 주더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옆에서 함께 듣고 있던 친구가 불쑥 말을 내뱉었다. “저게 바로 금강경의 핵심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자 파상(破相)의 극치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더는 위가 없는 바르고 평등하며 가장 완벽해 비교할 대상이 없는 무상정득각을 말하며 오로지 부처님의 깨달음만을 뜻한다. 말을 뒤집으면 부처님이 얻는 법이 바로 아뇨다라삼먁삼보리인 셈이다. 파상은 말 그대로 상을 깨는 것을 말한다.
요즘 불교계는 조계종 총무원장을 뽑느라 움직임이 부산하다. “승려는 종단의 공익과 중생 구제의 목적 이외에는 본인이나 세속의 가족을 위하여 개인 명의의 재산을 취득해서는 안 된다”는 조계종 승려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십 억의 은닉 재산은 기본이고 숨겨둔 아내와 자식이 화젯거리가 된 지 오래다. 조선시대 말기에나 들릴 법한 매관매직이 불교계에는 근자에도 성행한다는 소문 또한 파다하다.
도덕성이 성직자의 기본 중의 기본인데도 불구하고 서울대 문턱에도 가 본 적이 없는 승려가 자신의 저서에 서울대 졸업이라고 썼는데도 총무원장 후보 자격 심사를 버젓이 통과하는 한국 불교계의 행태가 중생인 나로서도 가소롭다. 상을 깨라는 파상을 계율을 깨는 파계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법정 스님의 바다 이야기가 도둑놈 소굴 이야기로 들리고, 볼펜 이야기는 상을 깬다는 불교가 조계종 파계로 들리는 요즘이다. 수술이 필요한 불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