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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 “아픈 뒤로 기쁨, 즐거움 같은 말 더 쓰게 돼요”
[한겨레] 6년 만의 산문집 <기다리는 행복> 출간
‘명랑투병’ 외치고도 눈물 흘린 사연
첫 서원 뒤 반세기 맞는 심정도 밝혀
6년만에 산문집 <기다리는 행복>을 선보인 이해인 수녀가 1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성 분도 은혜의 뜰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암투병 한 지 9년 됐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명랑투병’ 하겠다고 큰소리 쳤고, 단 한번도 병 때문에 눈물 흘리거나 푸념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항암주사 맞을 때마다 덮었던 분홍 타월을 투병 끝난 뒤에 보자니, 고통의 시간을 같이 견뎌 준 동료 같은 느낌이 들어서 눈물이 나더군요.”
이해인 수녀(사진)가 신작 산문집 <기다리는 행복>(샘터)을 펴냈다.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 이후 6년 만인데, 제목은 자신이 쓴 시 ‘기다리는 행복’에서 가져왔다. 1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한 시설에서 기자들과 만난 이해인 수녀는 “몸이 아프면서, 전에는 잘 쓰지 않던 기쁨과 즐거움, 행복 같은 단어를 더 많이 쓰게 되었다. 아픔이 축복의 기회를 만들어 줬구나 하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기다리는 행복>은 반세기 가까이 수도자로 살면서 시와 산문을 쓰고 독자를 만나 온 지은이의 신앙 생활과 작가로서의 삶을 담았다. “시의 산실이며 기도의 못자리”(머리말)이기도 한 부산 광안리 성 베네딕도 수도원의 일상, 기차와 공항에서 우연히 마주친 독자들과의 행복한 만남, 그리고 2008년 여름 암투병을 시작한 뒤 새삼 느낀 삶의 소중함과 동료 인간들에 대한 애정 등이 그득하다.
“최근에 내가 결심한 것 중 하나는 지금 나와 한 집안에서 사는 이들, 이렇게 저렇게 인연을 맺고 사는 지인들, 내가 사는 부산 광안리 수녀원으로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모두 한 송이 꽃으로 대하자는 것이다.”(111쪽)
이해인 수녀는 2008년 여름부터 암투병을 하면서도 강연과 집필 활동을 이어 왔다. 지난달에는 친언니인 이인숙 데레사 말가리다 수녀의 선종을 겪은 그는 “요즘은 더욱 충실히 ‘순간 속의 영원’을 살고 있”다고 머리말에 썼다.
6년만에 산문집 <기다리는 행복>을 선보인 이해인 수녀가 1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성 분도 은혜의 뜰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자신의 시 한 편을 낭독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책에는 법정 스님과 주고받은 편지와 작고한 소설가 박완서에게 전하는 글, 어머니 선종 10주기에 바치는 글, 세월호 추모시 등도 들어 있다. 종교와 나이, 성별을 떠나 우정을 나눴던 법정 스님과 어떤 일로 오해가 생겨 서로 날선 말을 주고받은 끝에 스님이 화해 조로 보낸 편지가 재미지다. “내 괴팍한 성미 때문에 수녀님께 상처를 입힌 일 두고두고 뉘우칩니다. (…) 수녀님 마음에 입은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면 광안리 바다에다 다 쏟아버리셔요. 물결 따라 흘러가도록요.”(256~7쪽)
이해인 수녀는 1968년 5월 첫 서원을 하고 수녀가 되었다. 내년 ‘수도서원’ 50주년을 앞두고 나온 이번 책에는 첫 서원 뒤 1년 동안 쓴 단상 140여편도 실었다. 이 가운데 1968년 8월17일치 단상에서 그는 “신앙이 기초가 되어 있지 않다면 나는 결코 노래 부르지 않겠다. 시는 나를 신께로 인도하는 음악이어야 한다”며 문학과 신앙의 일치를 다짐한다. 첫 서원 50주년을 앞둔 그의 지난 삶은 처음의 다짐이 오롯이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54년 전 처음 시작했을 때는 막연히 두렵고, 끝까지 해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지금은 자축하고 싶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저를 키워 준 공동체, 동료들, 독자들, 그리고 저 자신한테도 고마워요. 마침표를 찍는 느낌이랄까. 하루 일을 마치고 저녁 노을을 바라보듯 뿌듯한 안정감 같은 게 있습니다. 젊은 시절의 열정은 그것대로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저를 객관화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 좋습니다. 세월이 주는 선물 같은 게 있어요.”
글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