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이날’]은 1958년부터 2008년까지 10년마다의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 합니다.
■1998년 2월5일 ‘귀하디 귀한’ 백석의 친필원고
20년 전 오늘 경향신문은 1면 기사로 한국 현대시문학사의 큰 봉우리인 백석(1912~1996)시인의 친필 원고가 발견됐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경향신문이 단독 입수한 이 원고는 백석이 영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의 단편 ‘훗새벽(FalseDawn)’을 번역해 1940년 만주의 ‘만선일보’에 게재한 일부로, 원고지 14매 분량이었습니다. ‘훗새벽’은 거짓 새벽이라는 뜻입니다.
백석의 친필 원고는 매우 드물었다고 합니다. 이 원고는 전남대 박물관장과 도서관장을 지낸 고재기씨(당시 81세)가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고씨가 1940~1941년 만주에서 발간된 ‘만선일보’ 편집자로 재직하던 시절에 입수해 보관해 오다가 법정 스님을 통해 백석의 연인이었던 김영한 할머니(당시 81세)에게 건네줘 빛을 보게 됐습니다.
백석은 1930년대 조선문단의 최고 서정시인으로 꼽혔으나 해방이후 북한에 머무르는 바람에 남과 북에서 버림받은 비운의 대시인입니다. 신경림 시인은 “내가 우리 시에서 단 하나만 꼽으라고 해도 서슴지 않고 꼽는 시인이 백석이다”라고 했고,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은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한국시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시의 하나다”라고 했습니다.
백석은 27세때인 1939년말 만주로 건너가 1945년 해방전후 북한으로 돌아오기까지 5년 동안 만주에서 방랑생활을 했습니다. 백석의 친필원고를 소장해온 고씨에 따르면, 백석은 만주에 머무르는 동안 일본에서 유학한 지식인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만선일보’ 편집국장이었던 홍양명씨인데, 그는 가난한 백석에게 용돈을 대주기 위해 ‘만선일보’에 글을 쓰게 했다고 합니다.
백석은 과묵한 데다 얘기 상대가 별로 없었지만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였습니다. 백석은 방 안에서 잠을 잘 때 항상 새 신문지를 깔았다고 합니다. 백석은 당시 유행했던 감색양복을 주로 입고 다녔는데, 늘 하얀 명주를 양복 안에 받쳐서 입었다고 합니다. 백석의 깔끔한 성격과 결벽증을 말해주는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