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광장] 소유인가, 소통인가
예전의 어머니들이 정화수 떠 놓고 빌었다면 오늘날 어머니들은 성전에서 손 모으고 머리를 숙인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정성은 절대자를 찾게 한다.
법정스님의 ‘무소유’ 중에 부모가 포기해 두고 간 젊은이를 스님이 어떻게 대했는가에 대한 글이 있다. 그 글은 교사 첫해의 내게 큰 지침이 됐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나 또한 일제시대 법관이던 효봉선사의 글은 경전보다 먼저 부처님의 진리의 세계로 안내했다. 혜민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의 글은 마음 속에 시원한 바람과 따뜻한 바람이 되어 돌아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스님들이 용맹정진하고 있는 선원이나 사찰에서는 템플스테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들과 소통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가 달라서 또는 생업이 바쁜 중생이 선문에 들어서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중생들에게 어려운 경전 말씀을 쉽게 전하고 괴로움은 어리석음이나 집착 때문에 오는 것임을 깨우쳐 주며 소통하는 것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이다.
그런데 하버드에서 온 벽안의 현각스님이 얼마 전 혜민스님을 속물로 질타했다. 그러자 언론들은 혜민스님이 소유한 서울 요지의 부동산과 미국 국적자로서 갖고 있던 뉴욕 아파트를 들춰내고 시세를 밝혔다. 혜민스님의 속세 이름까지 일반에 공개됐다.
법정스님은 산속 외딴 곳에서 무소유를 실천하며 많은 글을 남겼다. 그런 법정스님이 ‘맑고 향기롭게’ 살기 운동을 전개할 때 종로에 있는 사무실을 빌려쓰면서 불편한 일들이 생겨나자 도량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10년을 두고 만류해 왔던 화주의 제안에 동의해 서울 성북동에 길상사를 세웠다. 스님은 1년에 몇 번씩 강원도에서 가서 수 천 명의 대중에게 법문을 전했다.
몇 년 전부터 종교인도 세법상 과세하게 돼 있어 인세나 강연 등을 통한 수익을 납부하고 있다. 혜민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서점가의 베스트셀러의 좌판을 지켜왔다. 스님은 납세자로서의 의무를 다했다.
혜민스님은 치유학교 운영과 명상 앱을 통해 대중과 교류해 왔지만 주거 공간의 실제 소유 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다.
혜민스님이 방황하는 젊은이들과 암울한 처지에서 이혼 또는 자살의 막다른 길에 들어선 극한의 마음들을 얼마나 위로하고 치유했는지 생각해보자. 이 무량의 범위를 부동산 가격처럼 계산할 수 있을까? 서울에서 진로문제로 고민하던 선배로서, 이국의 캠퍼스에서 사상적 체계를 섭렵한 학생으로서, 강단에 선 교육자로서, 그리고 수행자로서 혜민스님은 대중 속으로 들어왔다.
성직자를 존중하지만 아들이 승려의 길을 간다고 할 때 부모의 태도는 어떠했을까를 생각해본다. 속세에서 이룬 모든 것들을 버리고 출가의 길을 나서는 결단 앞에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승가의 계율은 단호하다. 하지만 오늘날 도심 깊숙이서 대중과 호흡하며 치유를 위해 애쓰는 적극적이고도 열린 수행자적 자세도 필요하지 않을까.
권정순 / 전직 교사·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