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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 23-07-04

    [경향신문] 수녀 시인의 통쾌한 직설, 따뜻한 위로 - 20.12.25.

본문

수녀 시인의 통쾌한 직설, 따뜻한 위로

배문규 기자


[책과 삶]수녀 시인의 통쾌한 직설, 따뜻한 위로

이해인의 말
이해인·안희경 지음
마음산책 | 308쪽 | 1만6500원

안희경: 울적한 코로나 시기를 보내는 이들에게 수녀님은 어떤 조언을 전하고 싶으신가요?

이해인: 저도 강의할 때마다 “우리가 당연히 누리는 것들에 새롭게 감사하고 새롭게 감탄하는, 그래서 당연하지 않은 듯 사는 것이 행복이다”라고 말하곤 했지요. 정말 실습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전부 코로나 수련생입니다.

안: 이럴 때 성숙할 수 있는 도약대가 될 만한 방법이 뭐가 있을까요?

이: 나랑 함께 사는 모든 사람이 또 하나의 나라는 생각을 하면 어떨까요? … 우리가 코로나 시기에 이기적인 예민함에서 이타적인 예민함으로 건너가는 그런 사랑을 해야겠구나 하고 배웁니다. 나를 향하는 사랑은 노력하지 않아도 되지만 타인을 향하는 사랑은 연습이 필요하니까요.

<이해인의 말>에서 시 쓰는 수도자 이해인 수녀는 구도자로서의 통찰부터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까지 소박한 듯 단단한 깨달음을 전한다. 마음산책 제공
<이해인의 말>에서 시 쓰는 수도자 이해인 수녀는 구도자로서의 통찰부터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까지 소박한 듯 단단한 깨달음을 전한다. 마음산책 제공

모니터 너머로 눈 맞추며
가을 내내 나눈 이야기들

“수녀가 다 좌파라고 하는데
모르겠고 우린 약자 편”
마음을 적셨던 글뿐 아니라
또 다른 깨우침을 준다

<이해인의 말>은 소박한 듯 단단한 성찰을 벼려온 시인이자 수도자 이해인 수녀가 재미 저널리스트 안희경 작가와 나눈 대화를 엮어낸 책이다. 지난 가을, 오후 3시면 안희경은 캘리포니아, 이해인 수녀는 부산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녀원 안 해인글방에서 각자 책상 앞에 앉아 모니터 너머로 눈을 맞췄다. 총 11장으로 정리된 인터뷰에는 56년 수도의 길에서 체득한 ‘담백한 물빛의 평화를 느낀다’는 이해인 수녀의 인생관, 인간관, 종교관이 담겼다.

이해인 수녀는 19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출간한 이래 저서 수십권을 펴냈다. 자연의 친근한 소재와 생명에 대한 통찰이 담긴 작품으로 시의 대중화를 이끌었음에도, 그의 문학적 지향은 깊이 있게 다뤄진 적이 드물다. 책에선 사랑, 기쁨, 평화 등 그가 한결같이 강조해왔던 메시지뿐만 아니라 병상 생활을 비롯한 평생의 삶을 회고하는 가운데 구도자로서의 깨달음을 전한다.

첫 대화 주제는 코로나19였다. 이해인 수녀는 우리 모두가 코로나 수도원에 있는 수련생이라면서 “숨어 있는 희망을 찾아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이 고통의 시간에서 할 수 있는 기쁨을 찾자고, “코로나가 우리에게 준 선물은 진짜 안으로 나를 들여다보고 이웃을 자세히 보게 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팬데믹의 근본적 원인인 인간의 소비문화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꽃은 필 때도 아름답지만 질 때도 아름다워요. 모든 생명이 신기하고 살아 있음이 사랑스럽죠. … 무생물, 생물, 우주 만물에 깃든 존재는 다 연결되어 있어요. 주변의 솔방울 하나와도 친교를 나누는 삶이 생명을 사랑하는 하나의 방법 아닐까요?”

책을 읽다 보면 이해인 수녀를 편견에 가둬놓고 듣기 좋은 얘기들만 취사한 것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해인 수녀는 아름다운 서정을 노래한다고만 알려져왔으나, 책 속 그는 입체적 면모로 가득하다. 이를테면 1980년대 명동성당 파견 근무를 나갈 당시 자신은 수녀원에서 도시락을 싸서 부랴부랴 버스 타고 출근해 찬밥을 먹었는데 신부들은 성당 앞 호텔에 가서 예사로 뷔페 음식을 먹었다고, 또한 수녀들도 평신도와는 거리를 두려 했다고, 교회 내부의 권위적 문화를 비판한다. 그러면서 소수자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남미 출신이었던 점을 상기하며 말한다. “저는 이분이 로마에서만 살았다면 사회를 보는 시각이 이랬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차별과 가난을 경험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리더의 모습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 진정한 하느님의 모습은 인간이 만든 법을 넘어서 자연스럽게 인간을 사랑하는 것에 있구나 새록새록 느낍니다.”

책에서 흥미로운 대목 중 하나는 법정 스님과의 교유 현장이다. 그는 법정 스님이 1978년 손수 붓으로 쓴 두루마리 편지를 소개한다. 편지에서 법정 스님은 “수도자의 고독은 단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바닥 같은 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도구이기에 고독을 배우자”고 한다. 이해인 수녀는 혼자이면서 함께이기도 한 구도자의 태도를 읽어내며, 고독을 타인을 향한 사랑으로 확장한다. 실존적 통찰을 주는 철학자, 페미니스트 영성에 기반한 여성 수도자로서 이해인 수녀를 만날 수 있다.

세월호 유가족을 향한 위로나 성매매 여성 자활사업에 대한 관심, 박노해 시인·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콜트콜텍 해고노동자 임택춘 등과의 인연에선 일상과 사회 속 차별에 민감한 진보주의자로서의 태도도 읽을 수 있다. “일부 신자들이나 친지들은 수녀들이 다 좌파라고도 해요. 좌파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약자 편’이라고 제가 정정해주죠.” 시대의 징표를 읽어가며 소리 소문 없이 사회운동도 한다. “우리는 맨날 성명서나 탄원서에 사인을 합니다. 해고 노동자들에 대해서 깊은 속사정은 몰라도 원장이 마이크 잡고 처지를 설명하고 ‘서명하자’ 그러면 얼마나 고통 받고 있을까 마음이 쓰여서 한 줄이라도 더 읽고 동참해요. 남들이 볼 때는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며, 세상사엔 관심 없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 의식은 약자들에게 계속 열려 있어요.”

물리적 거리를 넘어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테이블 한쪽에 앉아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몸과 마음이 추운 세밑, 평범한 말 속 일상의 진리가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그의 마지막 당부는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것. “나를 제치고 남을 온전히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https://www.kh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