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정불심] 5. 김인숙 前불교여성개발원장 어머니
- 기자명박원자/ 작가
- 입력 2021.03.05 11:10
- 수정 2021.03.05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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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다 내주고 가라”
한국 1세대 보살 명원 김미희
일지암 복원 등 茶 진흥 힘써
전국 사찰 불사도 큰 힘 보태
마지막까지 타인 도운 원력들
김인숙·김의정, 두 딸이 계승
불가에서는 여성신도, 특히 어머니들을 보살이라 부른다. 여자는 어머니일 때 보살에 가장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무아를 실천하는 사람을 보살이라 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분별심을 여의어 탐욕을 부리거나 화를 내지 않고 어리석은 마음을 내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나’도 ‘나의 것’도 없다. 내가 소유한 것을 아낌없이 내놓는다. 그리고 모든 존재가 평등함을 알고 이를 실천한다. ‘세상의 어머니’로 불리는 보살이 있다. 내 자식보다 남의 자식들을 더 귀히 여기고 사랑했다. 세상을 향해 내가 지닌 것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전쟁으로 인해 피폐화된 사찰을 복구하는 데 수십, 수백 포의 시멘트를 보냈고, 절에 불경을 보시해 문서포교에 앞장섰다. 말년에는 아픈 몸을 이끌고 우리나라 차(茶)의 본산지인 일지암 복원에 앞장섰고, 조계사 신도회장직을 맡아 마지막까지 자신이 가진 힘을 아낌없이 쓰고 갔다. 현대 한국불교 1세대 대보살로 불리고 있는 명원 김미희(1920~1981) 여사가 그 주인공이다. 쌍용그룹 창업주의 아내보다는 사회운동가, 차 문화 연구가 및 보급자로 더 알려진 보살이다. 명원 김미희의 큰 딸로 어머니의 보살행을 이어받아 실천하고 있는 불교여성개발원 3~4대 원장 김인숙 보살(국민대 명예교수)을 만나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든셋의 딸이 추억하는 어머니는 이 땅의 어머니들이 본받아야 할 ‘참 보살’의 모습 그대로여서 감동 깊었다. 가장 궁금한 질문부터 했다. “따님이 보셨을 때 어머니의 불교는 세상에 어떤 역할을 한 것일까요?”“말보다는 실천이 앞섰던 분이세요.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도와주셨죠. 일 분도 안 걸렸어요. 뭘 재어 두질 못했어요. 아버지께서 우리들에게 그러셨죠. 네 엄마는 간이 몸속에 있어 다행이지 밖에 있었으면 큰일 냈을 거라고 했죠. 일 년에 중소기업 하나씩은 없애고 있다고 하셨으니까요. 당신 것은 아무 것도 없었어요. 나는 우리 어머니처럼 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어요.” 그렇게 베풀기를 좋아했던 어머니가 타계하시고 보니 자신 앞으로는 땅 한 평, 집 한 채 남기지 않으셨다. 착오가 아닌가 하고 국세청에서 조사가 나왔을 정도였다. 다만 안방 서랍에서 수 십 개의 적금통장이 나왔는데, 통장의 주인이 집에서 일하는 찬모, 정원사, 운전기사 등의 것이었다고 하니, 가히 보시의 화신이 아니었을까 싶다. 장마가 나면 피해를 입은 전국의 절에서 전화가 왔고 어머니는 쌍용양회에 전화를 해서 바로 다음 날 절에 시멘트를 보냈다고 한다. 서울 신문로에 있던 집은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김 원장이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집이 여관처럼 바뀌어있었다. 담벼락 위에 2층으로 방을 지어 아버지 고향에서 공부하러 올라온 일가친척들을 묵게 하고 있었다. 아침에 준비해놓은 도시락이 몇 십 개였다. 하루 백여 명이나 드나드는 식객들을 위해 밖에 따로 지어놓은 식당에서는 하루 종일 국과 찌개가 끓고 있었고 사람들이 끊임없이 드나들며 밥을 먹었다. 하루 한 가마니의 쌀을 소비할 때도 있을 정도로 아침부터 신문배달, 구두닦이, 동네 순경, 우편배달부, 지나가던 동네 기사들이 와서 따뜻한 밥을 먹고 갔다. 어머니는 스님들만 도와준 게 아니었다. 여름에 골짜기에 가족들이 놀러가는 날이면 가족 수보다 다섯 배 정도의 음식을 더 만들었다. 수십 인 분의 음식을 만들어 주변 동네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고 돌아왔다. 남은 것은 절대 가지고 오지 말라는 게 어머니의 명이었다. “우리 어머니 통이 큰 것은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어요.” 당시 ‘부탁할 일이 있으면 서울 신문로에 사는 김미희 보살을 찾아가’라는 얘기가 돌았다고 하니, 보시를 행하는 품이 얼마나 드넓었는지 알 수 있다. “어머니께선 따님들에게 어떻게 불심을 심어주셨죠?” “어머니는 스님들을 지극히 공경하셨어요. 집에 스님들이 오시는 날이면 우리를 불렀어요. 스님들께 절을 올리게 하고, 불사에 필요한 심부름을 시키셨죠. 음양으로 불사를 돕게 하면서 불심을 키워주셨던 것 같아요.” 법정 스님과의 일화다. 3명의 젊은 스님들이 어머니를 찾았다. 유난히 바짝 마르고 말 한마디 없이 앉아있던 스님이 눈에 띄었는데, 바로 법정 스님이었다. 법정 스님이 사회운동을 하면서 봉은사에 있을 때였다. 서울 생활을 끝내고 송광사로 들어가려는데 토굴을 지을 불사금을 희사해주었으면 하는 청을 넣으러 온 것이다. “토굴을 짓는 데 얼마나 들어갑니까?”스님들은 자신들이 그녀를 찾은 이유를 말했고,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긴 말을 싫어하고 요건만 간단하게 듣고 말하는 게 어머니의 대화방식이었다. 당시 한옥 3채 값의 시주를 약속하면서 그 자리에서 두 딸들에게 명했다.“너희가 오분의 일씩 마련하고 나머지는 내가 드리마.” 스님들이 바람처럼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약속한 불사금으로 불일암이 지어졌다. 한두 해 후 어머니는 일지암 복원을 위해 지리산을 다녀오면서 불일암에 들렀다. 그리곤 돌아와서 두 딸들을 불러 이렇게 흡족한 마음을 드러냈다고 한다. “빨아서 솥뚜껑에 올려놓은 행주며 바닥은 또 얼마나 청결한지 떨어진 밥알을 주워 먹어도 괜찮겠더라. 화장실도 볼 일을 보고 솔잎으로 덮어놓게 해놓으셨더구나. 비구 스님도 그렇게 깔끔하게 살림을 하는데 여자들인 너희는 그 살림이 뭐꼬?”김인숙 원장이 어머니를 통해 특별히 기억하는 수행자는 잠실 불광사를 지은 광덕 스님이다. 불광사 불사를 위해 어머니를 찾아온 광덕 스님의 모습은 법복을 입은 한 마리의 학과 같은 모습이었다. 창백한 낯빛에 곧 쓰러질 것처럼 약해보였던 광덕 스님은 불광사 불사에 대한 의지를 피력할 때는 마치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는 것처럼 있는 힘을 다 쏟아냈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절을 짓는 데 필요한 시멘트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얼마 후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김 원장이 동생인 김석원 회장에게 얘기해 어머니의 약속이 실현되게 했다. 근 한두 주 동안 시멘트를 실은 레미콘이 몇 십대가 동원되어 전달되었다. 광덕 스님의 불교의 현대화에 대한 깊은 발원과 포교 열정이 꽃을 피우는 데에는 어머니의 보시가 큰 몫을 발휘했던 것이다. 이러한 어머니를 보면서 딸들의 신심도 커졌고, 어머니가 했던 것처럼 보시행을 실천하게 되었으리라. 3남 3녀의 장녀인 김인숙 원장과 차녀인 김의정 명원문화재단 이사장(전국신도회 전 회장)이 어머니의 불심을 물려받았다. “저는 어머니에게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자비심을 배운 거 같아요. 학교에 근무할 입시철이 되면 떡을 해서 수고하는 교수들은 물론 직원들에게도 똑같이 드렸어요. 청소하시는 분들에게 제 연구실 열쇠를 주어 제가 학교에 안 나오는 날 들어와서 쉬라고 했어요. 그분들이 불교 책을 가장 많이 빌려가서 읽었고 제가 은퇴할 때 가장 서운해 하셨죠.” 김 원장은 사회복지를 전공했고 유학을 다녀와 국제부인회 복지 담당 임원으로 있으면서 사북 탄광촌 아이들에게 매달 장학금을 보내는 등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어머니의 기도수행은 어떠셨을지 궁금하네요.”“어머니의 기도는 아버지가 돌아가고 나서부터였던 것 같아요. 사회활동을 거의 차단하고 아침마다 천수경과 금강경 등의 경전을 읽고 사경을 하셨죠. 겨울에도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독송 테이프를 틀어놓았어요. 정원의 새들과 연못의 물고기들도 경전소리를 듣고 해탈하라는 마음에서였죠. 어머니는 인과를 철저히 믿으셨어요. 인과응보에는 에누리가 없다면서 자기 업장은 자기가 없애야지 남이 대신 갚아주지 못한다고 하셨죠. 아버지가 일찍 타계하시자 슬퍼하며 우는 우리들에게 너희들이 복이 모자라 아버지와의 인연이 너무 짧았으니, 앞으로 더 참되게 살아서 다음에 아버지를 만났을 때는 긴 인연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셨어요.”젊었을 때는 그 말씀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인과법문이었다. 인과법을 알면 원수를 두어서도 안 되겠고 오늘 여기서 선한 인연을 만들면서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인과를 정확히 알고 살아야 하는 것이 곧 불교임을 어머니를 통해서 배운 것이다. 말년에 어머니가 지병인 간경화로 거동이 불편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조계사 신도회장직을 맡았다. 걱정하는 자식들에게 이렇게 일렀다고 한다.“내일모레 죽을 할마씨한테 신도회장을 맡겼을 때는 좋은 일을 좀 더 하라고 한 것 아니겠니? 죽기 전에 내가 좋은 일 좀 하려고 맡은 것이니, 반대하지 말아라.” 찾아오는 사람들이 설혹 거짓말을 해도 그대로 믿었고,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고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며 보시 실천에 앞장섰던 어머니였다. 누리는 권력은 오래 가지 못한다. 그러나 받드는 권력은 영원한 생명력을 발휘한다. 받드는 삶을 사는 사람이 진정한 보살이다. 김인숙 원장이 어머니가 그런 분이었다. 박원자/ 작가 hyunbulnews@hyunbul.com 기자의 다른기사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출처 : 현대불교신문(http://www.hyunbu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