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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07-12

    [시사위크] [박영재의 향상일로] ‘세탁(洗濯)’에 대하여 - 21.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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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재의 향상일로] ‘세탁(洗濯)’에 대하여

  • 박영재 서강대 물리학과 명예교수  
  •  입력 2021.08.06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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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배경: 최근 코로나 확산에 무더위까지 겹친 상황에서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을 더욱 답답하게 한, 사찰 경내에서 음주로 인한 방역조치 위반사례가 널리 보도되었습니다. 물론 해당 지자체는 과태료 처분을 내렸으며 소속종단과 사찰 관계자는 “참회한다”는 사과문을 발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비단 이 일뿐만이 아니라 잊을만하면 종교를 초월해 초심(初心)을 망각한 종교인들의 일탈행위들이 지속적으로 일반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이런 일들이 적극적으로 줄어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세탁(洗濯)’에 대해 두루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 세탁(洗濯)

‘세(洗)’는 원래 ‘사람이 발을 물[氵=水]로 씻다’라는 뜻으로 쓰였으나 이제는 폭넓게 그냥 ‘씻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또한 ‘탁(濯)’은 본래 ‘새가 물로 깃털[적(翟)]을 씻다’라는 뜻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씻다’는 뜻의 두 글자가 결합한 세탁은 ‘철저히 씻다’로 새기면 좋겠지요. 참고로 필자는 둘레길을 산책하다가 직박구리 한 쌍이 교대로 보초를 서면서 서식지 근처의 물웅덩이에서 목욕하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즉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은 편안하게 목욕을 하지만 새를 포함해 대부분의 약한 동물들은 목숨을 걸고 씻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중독된 우리 모두 짐승들의 이런 태도를 본받아 틈날 때마다 초긴장 상태로 몸과 마음을 철저히 세탁한다면 결코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탈행위가 빈번하게 일어나지는 않겠지요.

◇ 세탁의 큰쓰임

먼저 언론을 통해 끊임없이 보도되고 있는 돈세탁을 포함해 다른 사람들이 명의를 이용한 재산감추기 등의 다양한 탈법 행위들은 우리 모두 쉽게 접해오고 있기에 세탁의 본뜻을 크게 왜곡한 구체적인 사례들은 거론할 필요조차 없겠지요.

한편 보기를 들면 표절이나 대필 등을 통한 석박사 취득 사례 관련해 신분 세탁[상승]이란 용어도 대개 부정적으로 쓰이지만, 긍정적으로 쓰인 멋진 큰쓰임[大用] 사례들도 적지 않아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고려 말기,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 선사는 13세에 출가했으며 19세와 33세 및 37세 때 깊은 통찰 체험을 했으며 38세 때 마침내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널리 참구되고 있는 ‘조주무자(趙州無字)’ 화두를 타파하며 큰 깨달음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그는 왕족이나 귀족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상류층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수행을 이어가다가 46세 때 원나라로 건너가 당대 최고의 선승이었던 임제종(臨濟宗) 석옥청공(石屋淸洪, 1272-1352) 선사로부터 인가(印可)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접한 원나라 순종(順宗) 황제는 보우 선사에게 금란가사(金欄袈裟), 침향(沈香), 불자(拂子) 등을 하사하면서 영녕선사(永寧禪寺)의 주지로 임명합니다. 마침내 국제적으로 신분 상승에 성공한 그는 48세 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고려로 귀국합니다. 그리고는 공민왕 때 승려로서 최고 신분인 왕사와 국사로 중용되면서, 한국 임제종의 초조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그후 그는 신분 상승의 이점을 살려 비록 훗날 조선 시대로 접어들면서 배불(排佛) 정책의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사료되는, 점점 비대해져 가는 사찰경영을 개선하지는 못했으나 간화선풍(看話禪風) 진작을 포함해 고려 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 세탁소와 선원

웬만한 세탁물은 보통 집에서도 충분히 세탁할 수 있으나, 집에서 세탁할 수 없는 큰 세탁물이나 잘 지워지지 않는 얼룩 등은 세탁소 주인에게 맡겨 세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잘 따져보면 선원(禪院, 마음닦는 곳의 대명사)도 세탁소와 기능이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원의 스승은 마음 세탁소의 주인이며 수행자들은 스승의 도움을 받으며, 때 묻은 마음을 선원에서 잘 세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일반인들이 세탁한 깨끗한 옷을 입고 자기 전문직에 충실하듯이, 수행자들도 마음이 세탁됐으면 그저 유유자적한 삶을 홀로 고고하게 누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 뛰어들어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갈 때 세탁된 마음은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덧붙여 아무리 깨끗한 옷도 한동안 입고 나면 때가 묻게 마련이듯이, 이웃과 함께 했던 수행자들 역시 때때로 다시 선원을 찾아 그동안 낀 마음의 때를 말끔히 씻어내야 할 것입니다.

사실 거창하게 선원이라고 칭했지만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도 얼마든지 각자 있는 그 자리에서 바쁜 하루 일과 가운데 틈을 내어 꾸준히 참선(자기성찰의 대명사)을 한다면 웬만한 마음의 때는 즉시 다 씻어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가끔 틈날 때마다 스승을 찾아뵈며 자신의 수행 상태를 점검한다면 평상심을 늘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더 나아가 그러노라면 어느새 보다 많은 사람의 마음을 세탁할 수 있는 선원의 스승으로 탈바꿈해 있는 자신을 문득 인득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선원 부족 타령만 할 것이 아니라 기존의 놀고 있는 시설물들을 지혜롭게 활용해 이런 목적의 선원을 전국 방방곡곡에 열어놓는다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그 자리가 보다 빨리 천국이고 극락으로 탈바꿈하겠지요.

그런데 만일 세탁소 주인이 무능해 손님이 원하는 대로 세탁을 해주지 못할 경우 손님들의 발길이 끊기듯이, 선원의 스승도 수행자들의 마음의 때를 제대로 씻겨주지 못한다면 그 선원에는 마음의 때를 씻으려고 오는 수행자가 점점 줄어들 것은 자명하겠지요. 참고로 최근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대학교에서 정년을 맞이한 교수님을 만나 담소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께서 필자에게 살고 있는 지역 근처에 규모가 큰 선원이 있어 수십 년 동안 가끔 방문했었는데, 몇 해 전 투표방식에 의해 역량이 미치지 못하는 스승으로 바뀌고 난 이후 그곳을 방문하게 되지 않더라고 하시네요.

◇ 조주 선사, 밥그릇을 씻어라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 선사가 지은 <무문관(無門關)> 가운데 그릇 씻기와 관련된, ‘조주세발(趙州洗鉢)’이란 화두가 다음과 같이 들어있습니다.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 선사께 한 승려가 ‘제가 선원에 처음 왔는데, 잘 지도해 주십시오.’라고 청했다. 그러자 조주 선사께서 ‘자네, 아침에 죽은 먹었는가?’라고 물으셨다. 이 승려가 ‘네, 죽을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조주 선사께서 ‘그렇다면 밥그릇[발우鉢盂, 출가승의 식기]을 씻어라!’라고 하셨다. 이때 이 승려가 깨쳤다.”

한편 이 공안에 대해 무문 선사께서 “조주 선사께서 입을 열어 진리를 전부 드러내셨네. 그런데도 이 승려는 이를 듣고도 참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네, 죽을 먹었습니다.’라고 한 대답은 마치 ‘종(鍾)’을 ‘항아리[옹(甕)]’라고 부르는 것과 같구나.”라는 조언을 덧붙이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다음과 같은 멋진 노래로 제창을 마무리하셨습니다.

“다만 너무 분명하기에/ 도리어 깨닫기 어렵네./ 등(燈)이 곧 불[火]임을 재빠르게 알아차렸더라면/ 밥은 이미 지어진 지 오래일 텐데.”

여기서 무문 선사께서는 바른 스승 밑에서 제대로 점검을 받지 않고 무작정 떠돌면서 홀로 참선을 하다 보면, 마치 어둠 속에서 종과 항아리를 보는 것과 같아서 이들을 분명하게 구별하지 못하고 허송세월하다 생을 마치는 일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이런 아둔한 승려에 대해 후대의 어느 선사는 “다시없는 명마를 앞에 두고도, 말 탈 줄을 모르다니!”라고 평하며 애석해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한편 비록 이 승려가 조주 선사의 첫 번째 가르침에서는 헤맸지만, ‘밥그릇을 씻어라!’라는 두 번째 지시에서 깨쳤다고 했는데 ‘이 승려는 무엇을 깨달았을까요?’가 이 화두의 요처(要處)입니다. 참고로 후대의 선사 가운데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손을 쓰지 말고 밥그릇을 씻어라!’는 응용화두로 제자들을 더욱 철저히 다그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밥그릇이라는 물건을 씻는 행위 과정 속에서 수행자의 마음까지 씻어 본래의 천진난만함을 회복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이 일화를 통해, 일상 속에서 접하는 사물과 마음이 둘이 아닌 ‘물심불이(物心不二)’의 가르침을 잘 엿볼 수 있습니다.


◇ 법정 스님의 활작략(活作略)

필자의 경우 학부 4학년 때 송광사로 1주일간 여름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물론 이때 식사를 마칠 때마다 고춧가루가 한 개도 남지 않도록 밥그릇을 철저히 씻었습니다만, 수련기간 내내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늘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련회가 끝나갈 무렵 당시 수련생 모두 불일암에 계신 법정(法頂, 1932-2010) 스님을 방문해 차 대접을 받으며 수행담을 듣고 단체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는 곧 해산하려는데 스님께서 불일암 마당에 빙 둘러서라고 하시더니, 갑자기 거대한 호수를 구경시켜주겠다며 나를 따라 하라고 하시면서 가랑이를 벌리며 머리를 그 사이로 넣고는 하늘을 쳐다보시는 것이었습니다. 얼떨결에 따라 했더니 과연 하늘이 멋진 호수로 탈바꿈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바로 이 순간이 스님의 활작략(活作略)에 의해, 수련생 모두 일주일 동안 ‘법문 듣기’나 ‘밥그릇 씻기’ 수련으로도 도달하지 못한, 마음의 때가 몽땅 씻겨진 천진난만한 동심(童心)의 세계로 문득 돌아갔었던 소중한 체험이었습니다.

끝으로 우리 모두 코로나 확산과 무더위 및 일탈행위에 관한 보도 등의 외적 요인에 흔들리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일상 속에서 틈날 때마다 종교를 초월해 각자 코드가 맞는 방식으로 ‘마음씻기[洗心]’ 행위를 이어가기를 간절히 염원드려 봅니다.

[약력]

박영재 교수는 서강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입자이론물리 전공) 학위를 받았다. 1983년 3월부터 1989년 8월까지 강원대 물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1989년 9월부터 2021년 2월까지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서강대 물리학교 명예교수이다.

한편 1975년 선도회 초대 지도법사였던 종달 선사 문하로 입문했으며, 1987년 스승이 제시한 간화선 입실점검 과정을 모두 마쳤다. 1990년 종달 선사 입적 이후 지금까지 선도회 지도법사를 맡고 있다. 또한 1991년과 1997년 화계사에서 숭산 선사께 두 차례 입실점검을 받았다.

박영재 서강대 물리학과 명예교수 sisaweek@sisa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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