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2.06.04 05:00
업데이트 2022.06.04 10:20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12년 전 세상을 떠난 법정 스님이 '무소유'에 대해 정의한 말이다. 그는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富)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라고 했다. 법정 스님은 1976년 발간한 산문집 『무소유』 등 30여 권의 책을 펴낸 수필 작가로도 유명하다.
'무소유'의 가르침을 남기고 떠난 법정 스님의 일명 '빠삐용 의자'를 본뜬 조형물이 전남 목포 목상고(옛 목포상고)에 생긴다. 목상고 동문들이 개교 100주년을 맞아 29회 졸업생인 법정 스님을 추모하는 조형물 건립을 추진했다.
조형물은 법정 스님이 전남 순천 송광사 불일암에 머물 때 직접 만들었던 의자를 실물 그대로 재현했다. 목상고 22회인 김대중 전 대통령 동상 인근에 설치됐다. 김 전 대통령 동상은 2010년 8월 김 전 대통령 서거 1주기를 맞아 동문회가 실물의 2배 크기로 제작했다.
목상고 측은 4일 "법정 스님의 '빠삐용 의자' 조형물은 지난달 25일부터 설치 작업에 들어갔고, 오는 19일 제막식이 열린다"고 밝혔다. 2020년이 개교 100주년이었으나, 코로나19 여파로 기념식은 올해 가을로 연기됐다.
법정 스님은 1932년 10월 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1956년 전남대 상과대학 3년을 수료한 뒤 같은 해 경남 통영 미래사에서 당대 고승 효봉(曉峰)의 제자로 출가했다. 1975년 송광사 뒷산에 직접 작은 암자인 불일암을 짓고 청빈한 삶을 실천하면서 17년간 홀로 살았다.
1994년부터는 순수 시민운동단체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고 이끌었다. 1996년 서울 도심 대원각을 시주받아 이듬해 길상사로 고치고 회주(會主, 법회를 주관하는 법사)로 있다가 2003년 물러났다. 이후 강원도 산골에서 직접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며 살다 폐암이 발병해 3~4년간 투병 생활을 했다.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78세 일기로 입적했다.
법정 스님은 불일암에서 땔감으로 쓸 장작으로 의자를 만들었다. 이름은 '빠삐용 의자'라고 지었다. 스님은 생전에 "(영화 속) 빠삐용이 절해고도(絕海孤島, 육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외딴섬)에 갇힌 건 인생을 낭비한 죄였거든. 이 의자에 앉아 나도 인생을 낭비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는 거야"라고 했다.
법정 스님이 숨지기 전 "장례식을 하지 마라. 관(棺)도 짜지 마라. 평소 입던 무명옷을 입혀라"고 한 말은 유명하다. "내가 살던 강원도 오두막에 대나무로 만든 평상이 있다. 그 위에 내 몸을 올리고 다비(茶毘, 화장)해라. 그리고 재는 평소 가꾸던 오두막 뜰의 꽃밭에다 뿌려라"는 말과 함께다.
입적 전 그는 사후에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된 모든 책을 출간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출판사들이 모든 책을 절판하기로 합의하면서 한때 스님의 일부 책 가격이 10만 원 이상 오르기도 했다.
법정 스님이 열반한 뒤 불일암은 그의 맏상좌(제자)인 덕조 스님이 지키고 있다. 스승이 만든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도 이어받아 이사장을 맡았다. 덕조 스님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사람들은 불일암 바깥에 진열된 의자를 진짜로 알고 있는데 똑같이 만든 이미테이션(모조품)"이라며 "스님께서 만드신 진품은 제가 (암자 어딘가에) 모시고 있다"고 말했다.
덕조 스님은 "예전에는 법정 스님이나 김수환 추기경 등 정신적인 지도자들이 세상을 향해 가끔 좋은 말씀을 하시면서 청량제 역할을 해주셨는데 요즘에는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어른들이 안 계시니 아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목상고에 설치될) 스님의 의자를 통해 스님을 기억하고 말씀을 되새긴다면 스님이 굳이 말씀을 안 하셔도 세상에 대한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며 "빈 의자의 핵심은 우리한테 주어진 유한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알뜰하고 보람차게 쓰라는 의미"라고 했다.
법정 스님을 상징하는 조형물은 목상고 동문회 의뢰로 김영원 전 홍익대 미대 학장이 재료비만 받고 제작했다. 불자인 김 전 학장은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상 등을 만든 국내 대표 조각가다. 김 전 학장은 "법정 스님을 존경해 그분의 책을 닥치는 대로 사서 모았다"며 "제안을 받고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다'고 선뜻 마음이 가 예산과 관계없이 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 장식도 없이 얼기설기 짜맞춘 '빠삐용 의자'가 법정 스님의 삶의 태도가 녹아 있고 무소유 정신에 가장 가까운 유품"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작품은 크기만 더 크고 '빠삐용 의자' 이미지를 세심하게 살펴 실물 그대로 살렸다는 취지의 설명이다. 조형물은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기 전 제작했고, 기간은 3개월 걸렸다고 한다.
조형물은 청동으로 만든 의자 밑에 지름 5.5m의 화강암으로 된 원형 조형물을 깔았다. 둘레에는 우리말과 한자로 '무소유' 글씨를 새겼다. 김 전 학장은 "나무는 야외에 두면 쉽게 썩어버리기 때문에 천년을 가도 변치 않는 청동 주물로 만들었다"며 "의자 밑에 있는 원상은 불교와 깨달음의 세계를 상징하고, 둘레에 '무소유'라는 글씨를 새긴 건 탑돌이를 하듯이 한 바퀴 돌면서 무소유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목상고 측은 "법정 스님은 스님이기 전에 삶의 철학을 제시한 종교 철학가"라며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우리나라 정계와 종교계를 대표하는 두 동문의 삶과 가르침을 한자리에서 되새기는 명소가 될 것"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동문회 내부에서도 '특정 종교인의 조형물을 세우는 게 맞느냐'는 이견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편가르기가 일상이 된 대한민국에 생전에 김수환 추기경 등 타 종교인들과 마음을 나누던 법정 스님의 철학이 꼭 필요하다'는 의견에 대부분 동의해 조형물 건립이 성사됐다.
고영일 법정 스님 기념 조형 건립위원장은 "불교 색채가 너무 강하면 거부감이 있을 수 있어서 흉상이나 기념비 대신 법정 스님을 상징하는 '빠삐용 의자'를 제작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강남일 목상고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은 "불교적인 의미로 해석하기보다 학생들이 법정 스님의 '무소유' 철학을 삶의 지표로서 접근할 수 있는 은유적 상징물로 봐야 한다"고 했다.
법정 스님의 후배들도 조형물 설치를 반기는 분위기다. 김현서 목상고(2학년·여) 학생회장은 "조형물이 생기면 저희도 자연스럽게 법정 스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영길 목상고 교장은 "학생들이 법정 스님의 철학이 담긴 조형물을 보면서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길렀으면 한다"고 했다.
1920년 6월 1일 문을 연 목상고는 현재 남녀 재학생 480여 명이 다니는 공립고다. 김대중 정부 때인 2001년 인문계로 전환된 뒤 전남제일고로 교명을 바꿨다. 이후 2013년 목포상고 시절 약칭인 목상고로 변경했다.
목포=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