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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12-16

    [오마이뉴스] 신문에 글 썼다가 징계까지... '무소유' 스님의 놀라운 과거 - 25.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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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글 썼다가 징계까지... '무소유' 스님의 놀라운 과거

[어떤 어른] 법정 스님이 '호국불교'를 반대한 까닭

25.08.24 19:10최종 업데이트 25.08.24 19:10

법정 스님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게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게 '무소유'라면서, '맑은 가난'의 가치를 강조했다. 이런 그의 말과 글에 힘이 실린 것은 무엇보다 그의 실천력 때문이다.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고 세속명이 박재철인 그는 지금의 전남대학교 상과대학을 다니다가 3학년 때인 1955년에 출가했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2020년도 박사학위논문인 여태동의 '법정의 시대정신 형성과 전개과정 연구'에 따르면, 그는 외지에서 공부하다가도 "틈만 나면 고향인 해남 우수영 선두리로 내려가 바닷소리를 자주 들었다"라고 말한다.

그는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를 좋아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를 자주 외웠다. 그가 바다나 강변만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산사도 즐겨 찾고 스님들도 좋아했다. 학생 시절에 지은 호도 청산(靑山)이다.

이 시기의 그는 건강 체질은 아니었던 것 같다. 위 논문은 스무 살 때인 1952년에 "심한 폐렴을" 앓았다고 알려준다. 건강상의 핸디캡을 안고 틈만 나면 산과 물로 다니며 <엄마야 누나야>를 읊는 것이 20대 초반의 법정이다.

종교적이기도 하고 문학적이기도 한 심성을 가졌던 그는 대학을 그만두고 진리 연구에 뛰어든 뒤에는 그 진리를 지키기 위해 고도의 실천력을 발휘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베트남전쟁에 대한 불교계의 태도를 비판한 일이다.

'요시찰 인물'이 된 법정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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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27일 서울 성북구 길상사에서 열린 '법정 스님 하안거 해제법회'에 선 법정 스님.연합뉴스

법정은 베트남전쟁 파병 계획이 발표(1964.7.10)되고 국회에서 파병 동의안이 통과(7.31)된 이후로 전국의 사찰들에서 울려 퍼진 기도의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하루빨리 전쟁이 종식되어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를 누리게 해달라는 기도가 나오지 않고, 도리어 전쟁을 부추기는 기도가 나오는 것에 문제의식을 품었다.

그는 1966년 7월 10일 자 <불교신문>에 기고한 '역사여 되풀이되지 말라'는 글에서 "요즘 이 나라의 방방곡곡 불교사원에서는 무운장구(武運長久)라는 깃발을 내걸고 기도를 하고 있다"라며 자신이 10대 초반에 봤던 살벌한 장면들을 거론했다.

"무운장구! 우리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저 군국 일제의 말기, 그들의 식민지이던 한반도의 하늘 아래 휘날리던 그 깃발을.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헤면서 파아란 동요라도 불러야 할 그 시절의 어린이들은 살벌한 군국의 노래를 불러야 했다. 무운장구! 무운이 오래오래 이어가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무력이 언제든지 왕성해지라는 것이고, 따라서 군국의 날이 영원불멸하라는 말이다. 그 어떠한 명분에서일지라도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악이다. 그런데 싸움을 말려야 할 종교인들이 그 싸움에 동조한다는 것은 더욱 큰 악이다."

법정은 호국불교를 지향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했다. 이 글에서 그는 "일체 중생을 내 몸같이 아끼라고 하신 불타의 교훈과는 그 거리가 십만 팔천 리나 멀다"라며 "어떤 이는 호국정신을 가리켜 자랑스러운 듯이 '한국 불교의 전통' 운운하지만 그것은 왕권에 기울인 아부이지, 일제 중생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보살의 길은 아니었다"라고 지적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승군들이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과 거란족의 고려 침공에 맞서 싸운 사실을 거론하면서 이 승군들이 "제단을 지키는 흑의(黑衣) 무사"에서 기원했다고 설명한다. 신단을 호위하고 신도와 성직자들을 보호할 필요성에서 한국 고대의 승군제도가 발달했던 것이다. 이런 승군들이 당나라·거란족·몽골족·일본 등의 침공으로부터 한민족을 지켰다.

승군들이 지킨 것은 세속 국가가 아니라, 수행의 터전인 신앙의 땅이다. 이것이 왕조의 관점으로 기록된 역사서에서는 '호국'으로 포장됐다. 왕권에 충성하는 호국불교가 한국 불교의 전통이 아니라는 법정의 지적은 신채호가 정리한 승군의 기원과 역사에 부합한다.

법정의 용감한 지적은 그가 '요시찰 인물'이 되는 원인이 됐다. 위 논문은 "이 사건으로 인해 종단에서 징계를 받았고, 정부로부터 집중적인 감시를 받는 계기가 되었다"라고 말한다.

호국불교를 거부했다고 해서 법정이 세상의 고통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출가한 것은 문학적이고 종교적인 심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열여덟 살 때부터 겪은 한국전쟁의 충격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수필가 장혜민이 쓴 <법정스님의 무소유의 행복>은 "삶의 고통을 알기에 이른 나이임에도 2년 전 종전한 전쟁의 고통으로 인해 보통 젊은이들이 갖고 있는 어리석음과 쾌활함을 잃었다"는 말로써 한국전쟁 휴전 이후의 법정을 묘사한다.

전쟁의 상처로 인해 세속적 의미의 청년다움을 잃은 법정은 자유를 갈구하며 출가를 단행했다. 위의 여태동 논문에 따르면, 그는 1993년에 쓴 <버리고 떠나기>에서 "6·25 동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존재에 대한 물음 앞에 마주 서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한 뒤 "집을 나온 그때의 심경은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세속과 산(山)을 이분법적으로 가르지 않았다. 산에 오른 뒤에도, 자유를 얻기 위해 세속에도 시선을 보냈다. 한국전쟁의 원인인 냉전체제의 한 축을 이뤘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세속의 역동성에 주목하고 적극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다.

위 논문에 따르면, 1968년에 발간된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에서 그는 "통도사에서 지내는 그해, 4·19를 맞이했었다"라며 "종교의 역사의식에 대해 골똘하게 생각하면서 세상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4·19가 준 신선한 충격은 그가 함석헌·장준하 등과 연대하는 계기가 되고, 마치 수행을 하듯 민주화투쟁에 나서는 동력이 됐다. 1960년대 초중반부터 이렇게 변모한 뒤에 나온 것이 1966년에 쓴 '역사여 되풀이 되지 말라'는 글이다.

민주주의 암흑기, 투쟁의 최전선에 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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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2일 서울 성북구 길상사에서 법정 스님의 법구가 순천 송광사로 가기 위해 운구되고 있다.유성호

그는 민주화투쟁을 지지하면서도 호국불교를 경계했다. 이는 불교 수행자가 세상과 대중을 위해 살지 않고 국가권력과 소수 지배층을 돕는 부조리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에 기초한 것이었다. 세상을 억압하는 세력에 맞서 승군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호국불교라는 미명하에 정치권력과 제휴하고 강대국의 약소국 침략을 응원하는 부조리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참된 자유를 얻기 위한 수행의 연장선상에서 민주화투쟁에 나선 법정은 1970년대 초중반에는 대표적인 민주주의 투사 중 하나로 떠올랐다. 박정희의 3선이 걸린 4·27 대선과 그 직후의 5·25 총선을 앞두고 발행된 1971년 4월 9일 자 <경향신문> 1면 좌하단은 "법조계·학계·종교계·언론계 인사 24명은 8일 하오 서울 YMCA회관에서 민주수호선언대회를 갖고 다가오는 두 차례 선거가 민주적이고 공명정대한 것이 되기 위해 민주수호범국민운동을 발의키로 결의했다"라며 종교계 대표 11인 중 하나로 법정을 거명했다.

이 시기의 법정은 경찰 및 정보원들과 자주 부딪혔다. "법정은 자신의 표현대로 하면 '걸핏하면 연행되는' 시절을 보내게 된다"고 <법정스님의 무소유의 행복>은 말한다.

3선 개헌(1969.9.14)에서 유신체제 선포(1972.10.17)로 이어지는 시기는 한국민주주의가 긴급조치시대라는 암흑기로 접어들기 직전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법정은 참된 자유를 위한 '수행'의 최전선에 있었다. 국가나 왕조를 지키는 호국불교가 아니라 국민과 세상을 지키는 호국불교를 실천하는 승려였던 것이다.

그처럼 과감히 맞서던 법정은 공안조작 사건인 제2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이 일어나고 무고한 사람들에게 사형이 선고되고(1975.4.8) 판결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되는 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이 때문에 민주화투쟁에서 한걸음 물러섰다. <법정스님의 무소유의 행복>은 "인혁당 사건으로 젊은이 8명이 사형선고를 받은 데 충격을 받고, 독재자에 대한 증오심을 이겨내기 위해 송광사 불일암으로 돌아가 다시 수행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불일암으로 올라간 것은 독재정권에 대한 그의 태도가 바뀌었음을 의미하지 않았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를 외우고 다녔던 그였다. 그런 그가 볼 때 인혁당 사건은 인간이 차마 벌일 수 없는 야만적인 일이었다. 그런 만행을 마주할 수 없어 뒤로 주춤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신념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장준하 사망 1주기에 발행된 1976년 8월호 <씨알의 소리>에 기고한 글에서도 확인된다. 이 추모글에서 그는 "우리는 늘 함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라며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올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그는 새벽이 올 듯하다가 밤이 계속되던 시기에 일어난 5·18 광주학살에 대해서도 저항정신을 표출했다. 위 논문에 따르면, 부득이 '광주사태'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었던 1986년에 발행된 <물소리 바람소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라 밖에서 보도되고 있는 생생한 영상 자료를 빌릴 것도 없이 이른바 광주사태에 대해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그 살벌하고 끔찍하고 무자비한 만행의 현장을 수많은 사람들이 몸소 겪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변명으로도 용서받기 어려운, 하늘과 땅이 함께 치를 떤 살육이었던 것이다."

불의와 부조리에 맞서는 법정 스님의 '수행'이 강인한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무소유 사상으로 무장한 승려였기 때문이다. 그는 욕심내지 말아야 할 것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오로지 자유와 진리에만 집중하는 수행자였다. 그랬기에 무소유에 관한 글과 말도 더욱더 힘을 받을 수 있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민주주의 암흑기에 이 땅에 빛을 밝히는 투쟁의 최전선에 있었던 법정은 2007년에 폐암선고를 받았다. "이 병고도 나를 찾아온 친구 중 하나"라며 "어르고 달래며 지내겠다"는 말을 한 그는 2010년 3월 11일 입적했다. 세속 나이 78세, 법랍 55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