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를 따라 오른쪽 길로 간다.
이 주변은 대사관(大使館) 거리다. 각국의 대사관 및 대사관저가 밀집해 있다. 집집마다 ‘철옹성’처럼 문들은 굳게 닫혀 있고, 마치 성벽같이 높이 견고한 벽이 외부 인을 차단한다. 그리고 해당 국가의 깃발이 펄럭인다.
길은 좁아서, 인도조차 없다. 오가는 차량들 때문에 걷기는 좀 위험하다. 치외법권(治外法權) 지역이라, 길을 넓혀 인도를 만들고 싶어도 그럴 수 없기 때문이리라.
이 철옹성 성벽들은 정말 멋지다. 특히 담쟁이가 아름다워, 촬영 명소가 됐다.
인근에 있는 길상사(吉祥寺)는 반드시 둘러봐야 할 명소다. 고급 요정인 ‘대원각’을 운영하던 김영한(법명 길상화)이 대원각을 법정(法頂)스님에게 시주, 사찰로 변했기 때문에, 아주 독특한 분위기의 도심 산사다. ‘길상화’는 관세음보살을 상징하는 꽃으로, 고로 절 이름도 길상사다.
▲ 길상사 정문/사진=미디어펜 |
1995년 6월 13일 대한불교 조계종(曹溪宗) 송광사의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했으며 1997년에 길상사로 사찰명을 바꾸어 창건하였다. 사찰 내의 일부 건물은 개.보수했으나 대부분의 건물은 대원각 시절 그대로다.
경내에는 극락전, 범종각, 일주문, 적묵당, 지장전, 설법전, 종무소, 관세음보살석상, 길상화불자공덕비 등이 배치되어 있다. 사찰의 본당인 극락전(極樂殿)에는 아미타부처를 봉안하고,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시민운동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도량으로, 해마다 5월이면 봉축법회(奉祝法會)와 함께 장애인, 결식아동, 해외아동, 탈북자 등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음악회를 개최한다.
승려이자 수필작가인 법정스님이 1997년 12월부터 2003년 12월까지 회주(會主: 법회를 주관하는 법사)로 주석했다.
2013년 서울 미래유산(未來遺産)에 등재됐다.
길상사 입구 일주문은 사실 4주문(四柱門)이다. 또 다른 절 일주문과 달리, 2층 문루다. 과거 요정이었던 까닭이다. 일주문과 천왕문(天王門)이 하나로 결합된 형식이다.
길상사의 상징 관세음보살상은 보살이지만, 천주교(天主敎)의 ‘성모마리아상’ 같은 느낌이다. 그 옆에도 바위에 좌불을 음각한 것을 세워놓았다. 보살상 오른쪽에는 7층 석탑이 솟았다. 주 법당인 극락전도 다른 절의 직사각형 건물과 달리, ‘ㄷ자’ 형태다.
그 앞에는 작은 아기부처님이 선(禪)에 들었다.
계곡 양쪽으로 크고 작은 독립건물들이 즐비하다. 대원각 시절에는 모두 손님 한 팀씩이 놀던 방들이다. 하늘나리 꽃밭 위 적묵당(寂默堂)은 지붕은 한옥이지만, 유리 미닫이문을 달았다.
맨 위쪽 건물은 진영각(眞影閣)이다. 바로 법정스님의 거처였던 곳이다.
법정스님은 한국의 선승이자, 수필 작가이다. 대표적인 수필집으로는 무소유(無所有), ‘오두막 편지’ 등이 있다.
속명은 박재철이다. 1932년 10월 8일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나, 1956년 전남대학교 상과대학 3년을 수료한 뒤, 그해 통영 미래사(彌來寺)에서 당대의 고승인 효봉(曉峰)을 은사로 출가했다. 1959년 3월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승려 자운(慈雲)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이어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승려 명봉(明峰)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하였다.
그 뒤 쌍계사, 해인사, 송광사 등 여러 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하였고, ‘불교신문’ 편집국장·역경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및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송광사 뒷산에 직접 작은 암자인 불일암(佛日庵)을 짓고, 청빈한 삶을 실천하면서 홀로 살았다.
1994년부터는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끄는 한편, 대원각을 시주받아 길상사로 고치고, 회주로 있었다. 2003년 12월 회주직에서 물러난 이후 강원도 산골에서 직접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면서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다.
그러던 중 폐암이 발병, 2010년 3월 길상사에서 78세(법랍 54세)로 입적(入寂)했다.
그런 스님을 죽음으로 내몬 범인은 매일 새벽 일어나자마자, 냉수 한 사발씩 들이키는 버릇이었다니, 새삼 찬 얼음물은 무더운 한 여름에도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든다.
진영각 담장 밑에, 스님의 화장(火葬)한 유골이 모셔져 있다.
실내에는 스님의 영정과 평소 입던 장삼 및 가사(袈裟), 글씨 액자, 필통 등 생전에 사용하던 소품들이 전시돼 있다. 툇마루 옆에는 평소 쓰던 소박한 나무의자에 꽃병이 하나 놓여 있고, 그 위엔 작은 우체통(郵遞筒)이 달려 있다.
이건 향기(香氣) 우체통이다. 평소 남들에게 말하기 힘들었던 고민을 엽서에 적어 넣으면, 맑고 향기롭게 손 편지 담당 자원봉사자가 위로와 응원, 공감을 전하는 답장을 보내준다.
진영각을 나와 극락전 쪽으로 내려간다. 계곡엔 반가사유(半跏思惟) 석상이 보인다.
계곡 반대쪽에 시주(施主) 길상화 공덕비와, 생전 그녀의 처소였던 듯 보이는 사당(祠堂), 3칸 짜리 소박한 ‘맞배지붕’ 한옥이 있다.
이렇게 길상사는 다른 사찰과는 여러 모로 다르다. 꼭 가볼 것을 권한다.
길상사를 뒤로 하고, 성북동 길을 따라 내려간다. 고급 넥타이 업체 누브티스 사옥이 보인다.
길 왼쪽 위에 선잠단지(先蠶壇址)가 있다.
사적 제83호 선잠단지는 조선시대, 왕비들이 누에를 치고 고치에서 실을 뽑아 비단 천을 짜는 시범을 보이고, 잠신(蠶神)에게 제사지내던 곳이다. 조선 왕비의 소임 중 하나는 친잠례(親蠶禮)를 지내는 일이었다. 한말까지 이 곳에 수령 300∼400년 되는 뽕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1471년(성종 2)에는 뽕나무가 잘 크고, 살찐 고치로 좋은 실을 얻게 해 달라는 기원을 드리고자, 동소문 밖에 선잠단을 지었다. 단에는 대를 모으고 중국 황제(黃帝)의 왕비인 잠신 서릉씨(西陵氏)의 신위를 배향했다.
또 그 앞뜰에 뽕나무를 심고, 궁중 ‘잠실’에서 키우는 누에를 먹이게 했다.
1908년(융희 2)에 선잠단은 선농단(先農壇) 신위와 함께 사직단으로 옮겨 배향되면서, 폐허화됐다. 지금은 성북초등학교 옆 길거리에, 집들에 둘러싸인 조그만 터전만 남아 있다.
선잠단지 앞에서 큰 길 건너 골목 안에, 최순우(崔淳雨) 옛집이 있다.
최순우 가옥은 국가등록문화재 제268호로, 1930년대 지어진 멋들어진 근대한옥(近代韓屋)이다. 바로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한 혜곡 최순우 선생이, 1976년부터 생애를 마칠 때까지 살던 집이다.
선생은 개성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희순(熙淳)이다. 송도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개성부립박물관장이던 고유섭 선생을 만난 것을 계기로 박물관에서 일하며, 미술사학자의 길을 걸었다.
평생을 우리 문화유산의 발굴과 보존, 현대적 전승, 해외 소개에 바치면서 전시와 저술을 통해,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강조했다.
이 집은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사랑채가 서로 마주 보며, 모서리가 트인 ‘ㅁ자’를 이룬다.
명저 ‘무량수전(無量壽殿)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했던 사랑방 앞에는, 선생의 친필로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 이란 글씨를 새긴 현판이 걸려 있다. 문을 닫으면, 곧 깊은 산속이라는 뜻이다. 방 안에는 조선 선비의 방처럼, 정갈한 목가구와 백자(白磁)가 놓여있다.
마당에는 산사나무, 산당화, 모란, 수련, 산국 등이 반겨준다.
뒤뜰은 더 아름답고 고즈넉하다. 꽃과 나무, 물이 어우러진 작은 정원에, 선생이 모은 석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맷돌, 문인석과 무인석, 돌확(물그릇), 둥근 탁자와 돌 의자 등이다. 장독대엔 크고 작은 옹기(甕器) 항아리들과 엎어놓은 떡시루가, 참 정겹다.
집 전체에서, 자연스럽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집주인의, 안목(眼目)과 멋이 느껴진다.
주변 지역이 개발되면서 옛집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2002년 시민들의 후원과 성금으로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매입, 보수와 복원을 마쳤다. 2004년 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으로, ‘시민문화유산(市民文化遺産) 제1호 최순우 옛집’이란 이름으로 개관했다.
시민자원봉사자들이 지키고, 관리하고, 안내하고, 성금도 모금하고 있다.
최순우 가옥을 나와,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 역으로 발길을 옮긴다. 도중에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이 심었다는 느티나무도 볼 수 있다.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