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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01-08

    [오마이뉴스] 여기구나, 법정 스님이 '무소유' 사색하던 곳 - 24.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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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구나, 법정 스님이 '무소유' 사색하던 곳



24.11.26 09:36l최종 업데이트 24.11.26 09:36l
 

조계산 송광사 입구 계곡의 청량각
조계산 송광사 입구 계곡의 청량각 ⓒ 이완우관련사진보기

승보사찰 송광사(松廣寺)가 있는 조계산은 옛 이름이 송광산이었다. 늦가을 11월 중순, 송광사 계곡에는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었다. 사찰 입구 청류 계곡에는 극락(極樂) 무지개 돌다리가 건너고, 그 돌다리 위에 청량각(淸凉閣)이 산뜻하게 올라앉았다.

청량각에서 계곡의 오른쪽 길은 송광사로 향하는 넓게 포장된 길이다. 청량각 왼쪽은 운치 있는 옛길이 이어진다. 이 옛길을 한참 걸으면, 송광사 산내 암자인 불일암(佛日庵)으로 오르는 오솔길이 산속으로 열린다.

송광사 입구에서 불일암까지 이 오솔길을 '무소유(無所有)길'(왕복 1.2km)이라 부른다.

조계산 송광사 입구의 가을 단풍 길
조계산 송광사 입구의 가을 단풍 길 ⓒ 이완우관련사진보기

호젓한 오솔길을 한걸음씩 천천히 올라갔다. 오르막길은 경사가 적당했다. 단풍 가득한 가을 풍경이 가깝게 다가와서, 가볍게 산책하는 마음이었다.

20여 분 시간이 천천히 흐르면 불일암에 도착한다. 무소유(無所有) 정신으로 널리 알려진 법정(法頂, 1932~2010) 스님이 1970년대 중반에 손수 이곳에 암자를 짓고 홀로 지냈다.

법정 스님이 수필집 <무소유>(1976년)를 저술했다. 돈과 권력이 최고라는 세상의 조류(潮流)와 다른 삶의 길을 걸으며, '무소유'라는 간단명료한 3음절 표어를 제시하였다.

송광사 불일암 오르는 산길은 무소유 삶을 실천한 스님이 자주 오르내리며 사색하던 생활과 수행의 공간이었단다. '무소유'는 '무 집착(집착 않음)', '무 탐욕(탐욕 없음)' 등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조계산 송광사 불일암 무소유 길
조계산 송광사 불일암 무소유 길 ⓒ 이완우관련사진보기

법정 스님은 불교 초기 경전의 하나인 <숫타니파타>를 번역하였다. 인간으로서 석가(釋伽, 석가모니)는 평생 무소유의 길을 걸으며 깨달음의 진리를 전파하였다. <숫타니파타>에는 석가의 초기 인간적인 음성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부처와 중생의 설법과 깨우침보다는, 스승과 제자의 자애로운 인간적인 가르침 성격인 <숫타니파타>가 진솔하게 마음에 다가왔다. '무소유' 간결한 이 3음절 표어는 역사적 인물 석가의 생생하게 변함없는 목소리였다.

조계산 송광사 불일암 무소유 길
조계산 송광사 불일암 무소유 길 ⓒ 이완우관련사진보기

11월 중순 늦가을, 단풍은 다양한 색감을 연출하고 있었다. 낙엽이 쌓인 흙길, 기다란 돌계단 길, 나무뿌리가 오솔길을 가로로 건너고 있는 나무뿌리 길 등. 숲 속에서 허공의 통로를 품은 가을 풍경으로 '무소유 오솔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무소유 오솔길을 따라 오니 암자에 가까워졌다. 대나무 숲길, 산죽 군락지 길, 불일암 사립문 앞 흙과 돌이 단정한 길, 불일암 축대 아래 잘 다져진 흙길, 불일암 가람 축대( 築臺)를 올라가는 돌계단 등. 집착 없는 무소유 길의 흐름은 암자로 이어졌다.

늦가을 암자에 핀 싸리나무 여름꽃

불일암에 이르는 오솔길을 오르며, 티베트 사찰의 불교 도구 마니차(摩尼車)가 떠 올랐다. 경전 구절이 새겨진 마니차를 돌리면, 경전을 읽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무소유 오솔길을 걸으면, 경전을 읽는 듯 텅 빈 공간과 마음을 체득하게 되지 않을까?

조계산 송광사 불일암
조계산 송광사 불일암 ⓒ 이완우관련사진보기

불일암 암자는 전면 3간, 측면 2간의 단출한 건물이었다. 사찰의 암자라기보다 어느 은거한 선비의 처소같이 단조롭고 소박하였다. 법정 스님이 이 암자에서 17년간 흰 구름과 맑은 바람처럼 잠시 머물렀다. 스님의 소중한 저서들이 이 암자에서 많이 쓰였다.

불일암 건물 왼쪽 흰색 벽면에, 스님의 작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묵언! 그 아래 작은 나무 판에 새겨진 2음절 글씨에 마음이 고요해졌다. 그 아래 소박한 나무 의자. 스님이 손수 몽둥이 굵기의 작은 통나무로 엮어 만든 듯했다. 투박한 작은 모양새가 정겨웠다.

조계산 송광사 불일암, 싸리나무 가을 단풍잎을 배경으로 핀 싸리나무 여름꽃
조계산 송광사 불일암, 싸리나무 가을 단풍잎을 배경으로 핀 싸리나무 여름꽃 ⓒ 이완우관련사진보기

불일암 옆 부도로 이어지는 산비탈에 싸리나무가 있었다. 가을 단풍잎이 노란 싸리나무 가지에, 여름에 피는 분홍색 싸리 꽃이 밝게 연등처럼 빛나고 있었다. 계절을 뛰어넘은 선명하고 밝은 색채의 대조, 그 무념무상이 해맑게 아름다웠다. 싸리나무는 꽃말이 상념과 사색이고, 싸리나무 꽃은 '들꽃처럼, 바람처럼, 햇살처럼'의 의미란다.

싸리나무는 마당을 쓰는 빗자루를 만드는 추억의 나무였다. 법정 스님이 이 싸리나무 가지로 빗자루를 엮어서, 암자 마당의 티끌을 쓸었을지 모른다.

조계산 송광사 불일암 앞 풍경, 왼쪽 나무 아래 법정 스님이 머물던 장소
조계산 송광사 불일암 앞 풍경, 왼쪽 나무 아래 법정 스님이 머물던 장소 ⓒ 이완우관련사진보기

불일암의 소박하게 폭이 좁은 마당 오른쪽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나무 아래에서 멀리 보이는 풍경 위 하늘에 흰 구름이 한가롭다. 이 장소에서 법정 스님은 얼마나 오랜 시간 사색하며 머물러 있었을까? 스님의 혼백은 이 나무 아래 묻혀 있다.

송광사 불일암 무소유 길은 제자로서 스승을 뵈러 가는 길인 오솔길처럼 친근했다. 무소유 길을 함께 걸어 올라온 어느 분이 먼저 키 큰 조릿대의 사잇길로 내려갔다.

그 또한 무소(코뿔소)의 뿔처럼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에 늦가을 노란 단풍잎을 배경으로 피었던 분홍색 여름 싸리 꽃이 밝게 겹쳐 보였다.

조계산 송광사 불일암 내려오는 키 큰 조릿대 숲길
조계산 송광사 불일암 내려오는 키 큰 조릿대 숲길 ⓒ 이완우관련사진보기